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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전쟁 명장 열전┃85 오동진 장군은 1922년 6월 양기탁이 제안한 만주지역 내에 독립투쟁 단체의 통합에 적극 찬 성하고, 양기탁, 김동삼, 현정경, 이상룡, 이 탁 등과 한족회, 대한독립단, 광복단, 광복군총영 등 여러 단체가 통합하여 통군부를 조직하고 재무부장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에 온 힘을 경주 하였으며, 이어 통군부가 대한통의부로 개편된 뒤에는 교통부장·재무부장·군사위원장으로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20년 창설된 광복군 총영 본부 유적지 (요녕성 관전현 양목천진 소구산촌 안자구) ▶ 정의부 의용군 무장투쟁을 지휘하다 1926년에 양기탁, 고활신, 현정경, 김봉국, 이규풍, 주진수 등과 함께 길림 영남호텔에 모여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고 그 위원으로서 정의부의 의용군 8개 중대 7백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였다. 정의부와 농민호조사, 고려혁명당 창설 유적지 (길림시) 정의부와 농민호조사, 고려혁명당 활동 유적 (길림성 길림시 1930년대 ) ▶ 오동진 장군의 옥중 투쟁과 순국 1927년 12월 16일 길장선 흥도진역에서 삼성 금광주 최 창학이 만나기를 원한다는 친일밀정 김종원의 모략에 속아 평북경찰고등계 악질 김덕기 경찰대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 었다. 오동진 장군의 법정투쟁으로 6년여의 재판 끝에 1932년 6 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무기형을 받았으며, 1928년 4월 에는 정의부 10중대원인 김여연, 최봉복 등이 총사령관인 오동진 장군을 구출하기 위하여 입국하다가 신의주에서 체 포되었다. 오동진 장군은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며 상고를 포기하고 무기징역형이 확정되어 경성형무소로 이 감되었으며, 1934년 6월 11일부터 48일간 단식을 벌였다. 1935년 일본인 의사가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진단을 내려 공주형무소로 옮겨져 모진 옥고 끝에 광복을 8개월 앞둔 1944년 12월에 옥중에서 순국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광복군 총영 본부 유적지 (요녕성 관전현 태평초진) 항일무장독립투쟁에 앞장서다 대한통의부와 정의부 군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