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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만주벌의 별이 되어 양세봉 장군은 1922년 천마산대에 가입 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하였고, 대한통 의부, 참의부, 정의부에서 독립군의 지휘 관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장 악하자,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 중국의용군 총사령관 이춘윤과 한중연합군을 편성해 그해 3 월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요녕성 흥경현 영릉가 성을 탈환하고 상협하까지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80여 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거둔 조선혁명 군은 산하에 5개 사령부를 거느리는 대부대로 개 편하고 총사령관에 양세봉 장군이 취임했다. 양세 봉은 내분을 수습하고 총사령관이 되어 남만에서 활동하던 요녕민중자위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본 관동군과 수백 차례 대소전투를 계속 해 나 갔다. 조선혁명군 본부 유적지 (요녕성 신빈현 왕청문진) 양세봉 장군은1896년 평안북도 철산 군(鐵山郡) 세리면(洗里面) 연산동(連 山洞)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 다. 이명은 서봉(瑞鳳), 윤봉(允奉)이 며, 호는 벽해(碧海)이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 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신빈현 왕청문에서 중국 인 왕동헌의 요녕농민자위단과 협의하여 연합부 대를 편성하였다. 1932년 1월 조선혁명당·군의 주요 간부들은 중국 신빈현 하북에 있는 서세명의 집에서 중앙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9·18사변 이후 당면한 현안 문제를 논의하던 중 친일주구단체인 보민회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통화 일본영사 분관 경찰의 습격을 받아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보안, 부사령 장세 용, 국민부 공안부 집행위원장 이종건 등 10여 명 이 체포되었고, 이후 3월 초까지 계속된 일경의 검 거로 9개 현에서 국민부, 조선혁명군 간부 83명이 체포되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조선혁명군 활동 유적지 (신빈현 2016년 시내모습) 조선혁명군 본부 유적지 (요녕성 신빈현 왕청문진 조선족 소학교터) 영릉가 전투 유적지 (요녕성 신빈현 영릉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 장군 영릉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