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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일대 6일간의 독립전쟁┃79 ▶ 백운평(白雲坪) 전투 1920년 10월 두만강을 건너 간도지역으로 침입한 일본군 아즈마(東正彦) 사단장은 10월 17일 산전(山田) 연대에게 10 월 20일 청산리 일대를 포위한 뒤,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공격 하여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김좌진은 동쪽 등성이에 이민화가 지휘하는 중대를 매복시 켰다. 산의 경사가 60도나 되는 산등성이였다. 김훈이 지휘 하는 중대가 매복한 중앙은 경사가 90도나 되는 깎아지른 절 벽 위였다. 이러한 절벽 위에서 소나무와 잣나무 가지로 위장 을 하고 쓰러진 나무둥지를 천연적 엄폐물로 삼고 두껍게 쌓 인 낙엽 속에 전신을 파묻어 어떠한 적들도 발견하기가 어려 웠다. 약 800미터 떨어진 곳에서 김좌진이 지휘하는 제1제대 도 동일한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산중에 완전히 엄폐된 상태에서 매복하여 절벽 아래의 공지(空地)를 향해서 총구(銃口)를 모았다.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의 지휘로 백운평 공지의 직소폭포에 매복하고 일본군을 유인했다. 10월 21일 아침 9시, 안천(安川) 소좌 전위부대가 백운평을 지나 독립군 매복지점으로 들어왔다. 일본군 전위부대가 나타나자 독립군 병사들은 각종 화력을 동원 해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일본군은 대포와 기관총 등으로 응 사하였으나, 지리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방어진을 구축한 독립군 의 맹렬한 공격에 여지없이 무너져갔다. 일본군 전위부대는 백 여 명의 시체를 남기고 산 아래로 퇴각하였다. ▶ 완루구 전투(完樓溝戰鬪) 백운평 전투와는 달리 완루구 전투(完樓溝戰 鬪)는 대한독립군, 대한국민회, 의군부, 한민회, 한국광복단, 의민단, 신민단 등의 부대가 연합하 여 수행한 전투로서 10월 21일 오후부터 22일 새 벽까지 어랑촌(漁浪村) 서북방 완루구 우거진 산 림 가운데에서 벌어졌던 전투이다. 홍범도 일지(日誌)에 완루구 전투에 대한 회고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날 밤으로 말리거우에서 날 밝기를 기다리면서 나의 심정이 난솔하여 밤중에 군사를 취군하여 말리 거우 제일 높은 산에 올라가 밤새 엎드려있었다. 날이 밝자 대포소리 한 방 나더니 사방으로 사격소리가 그치지 않고 단박에 말리거우 민간촌에 일본군이 달려드니 나의 군인 520명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벼락 치 듯 막 사격하니까 적들이 혼란에 빠져 헛총질을 해댔다. 밤이 삼경이 되도록 진을 풀지 못하고 답세우 며 공격을 감행하여 일본군을 거의 다 잡았다. 백운평에서 직소폭포 전투지 가는 길 백운평 직소폭포 전투 유적지 백운평 직소폭포 전투 유적지(해란강 발원지) 완루구 전투 유적지와 갑산촌 청산리 일대에서 6일간의 혈전을 전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