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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친일식민사학에 감춰진 진실, 의병전쟁 ▶ 의병전쟁, 그토록 숭고하고 위대했던 전쟁 서울진공작전은 일제의 왜곡 · 축소된 통계에 의해도 1907년 8월부터 1910년까지 연인원 14만 6,000명 의 의병이 2,820회의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08년 전투가 1,452회, 전투참가 의병이 6만 9,832명이었 다. 이 전투 대부분이 의병연합부대의 제2차 서울탈환작전 전투였다. 일본군사령부는 1908년 3월에 의병 전쟁의 종전을 예견했는데 도리어 5월에 의병의 재봉기로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의병 희생자는 일본군의 왜곡된 통계에 의해서 도 1907년 8월부터 1909년 말까지 전투 중 전사 한 의병이 1만 6,700여 명, 중상자가 3만 6,770 여 명이었다. 빼앗긴 조국을 찾으려고 이 짧은 기 간에 무려 5만 3,000여 명의 의병들이 이 땅 위에 선혈을 뿌린 것이다. 1945년 광복 후에도 청산되지 못했던 친일식 민사학자들에 의해 의병전쟁의 역사는 축소, 왜곡 되었고, 오늘까지도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3도창의대진소라는 최초의 전국연합의병부대 의 서울진공작전과 의병전투는 당시 전국 각지에 서 활약한 독자적 의병항쟁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 규모연합의병을 결성하였고, 참여한 의병의 수가 무려 1만 여명에 달하는 대규모였던 점, 세계만방 에 일본의 한국침략 부당성과 의병전쟁의 정당성 을 천명하였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13도 창의군 포천 광악산 전투지(좌) 연천 보개산, 파주 감악산 일대 제2차 서울진공작전은 약 30일간 1,000여 회의 밀고 밀리는 혈전 끝에 의병부대는 다시 탄약과 군량이 고갈되었고, 일본군의 대공세로 1908년 6월 서울 외곽으로부터 경기 북부, 황해도 지역으로 철수하였 다. 이은찬, 연기우, 김수민 등은 제2차 진공작전을 지휘하던 허위가 1908년 6월, 포천 일동면 유동리에서 체 포된 후 중국 만주 지역으로 거점을 이동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경기도 포천에서 창의원수부를 재 차 결성하고 항일투쟁을 계속 하였다. 제2차 서울진공작전의 의병 집결지(서울 은평구 북한산 흥국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