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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 13도창의군은 관동창의군 이인영, 진동창의군 허위 등이 1907년 11 월 경기도 양주, 현 구리시 수택동에서 1만여 명의 의병이 집결하여 결 성되었다. 1908년 1월, 군사장 허위는 300여 명의 선발대를 거느리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으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패퇴하고 말 았다. 서울진공작전 후 여러 의병들은 분산, 독자적인 항일전을 계속 수행해갔다.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항쟁이 보다 격화되어 가자, 일제는 야만적인 초토화작전을 전개, 의병활동지역 안의 촌락들 을 소각하고 주민들을 대량 살육함으로써 의병항일전의 근원을 봉쇄 하려 하였다. 특히, 호남일대의 의병 항쟁이 치열해지자,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에 걸쳐 이른바 ‘남한폭도 대토벌’이라는 의병진압의 대공세를 펼쳤다. 그 결과 정미의병은 1909년 후반기부터 점차 국내활동이 약 화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 후 만주지역으로 이동하여 독립전쟁으로 전환하여 활동하였다. 13도창의군 기념탑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로 일본군 수비대 병력 600명, 훈련대 800명, 일본군 장교와 언론인, 낭인 등으로 구성된 특수 대원 56명이 경복궁 안 건청궁 옥호루로 난입하여 명성황후와 궁녀들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 ▶ 일본정부의 위장전술, 암호명 ‘여우사냥’ 1895년 10월 3일, 일본공사관 밀실에서 미우라 고로 공사, 스기무라 서기, 오카모토 류노스케 일본군 소좌, 구스노세 사치히코 포병 중좌 등이 명성황후의 살해를 모의하였다. 일본의 작전명은 ‘여우사냥’. 이 들은 서울 주둔 일본군 수비대를 주력으로 조선정부의 일본인 고문,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조와 기 자 들, 영사경찰, 낭인배 등을 고루 동원하였다. 언론인과 낭인배들이 저지른 것처럼 위장한 까닭은 일본 군 이나 정부와는 무관한 일로 발뺌하기 위한 속셈이었다. 그리고 사후 책임전가를 위해 왕후와 정치적 대 립관계에 있던 대원군과 조선군 훈련대를 이용하였다. 일본정부 명성황후를 살해하다 일본정부의 음모, 명성황후를 살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