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page

Special theme • 3대 유림 독립운동의 중심 추, 이중업 · 김락 부부 41 보낼 1통의 글을 각각 작성했고, 이중업이 이를 중국 으로 가져갈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이중업은 중국 으로 출발하기 직전인 1921년 7월 23일(음 6.19) 급 서하고 말았다. 아들 형제와 사위의 항일투쟁 이중업 · 김락 부부는 2남 3녀를 두었다. 큰아들 은 이고(貳顧) 이동흠(李棟欽, 1881~1967)으로, 자 인길(仁吉), 둘째아들은 반산(泮汕) 이종흠(李棕欽, 1900~1971)으로, 자 창길(昌吉)이다. 큰딸은 이호 (李鎬, 1884~1917), 둘째딸은 이하계(李下溪), 그리 고 셋째딸이 있었다. 아버지 이중업이 급서한 후, 이동흠 · 이종흠 형 제는 제2차 유림단의거에 참가했다가 1926년 5 월 10일 일본경찰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김 창숙(1879~1962)이 1925년 초 중국 베이징에 유 학중이던 봉화 김화식(金華植, 1904~1952), 영주 송영호(宋永祜, 1903~1968), 대구 이봉로(李鳳魯, 1872~1922) 등과 협의하여 중국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한다는 목표 아래 비밀리에 자금을 모집하였다. 김화식과 송영호를 국내로 파견하여 옛 동지를 규합 하고 ‘신건동맹단(新建同盟團)’이라는 군자금 모금 단을 결성했다. 이동흠 · 이종흠 형제는 여기에 참여 했다. 일제는 이를 ‘경북유림단사건’이라고 칭했으 며, 학계에서는 ‘제2차 유림단의거’로 부른다. 형제 는 1926년 5월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1927 년 1월 21일 이동흠은 면소, 1927년 3월 29일 이종 흠은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고 풀려났다. 이동 흠은 1980년 대통령표창, 이종흠은 1990년 건국훈 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이중업 · 김락 부부의 큰딸 이호는 의성김씨 학 봉종택의 종손이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의 손자인 김용환(金龍煥, 1887~1946) 과 혼인했고, 둘째딸 이하계는 정재(定齋) 류치명 (柳致明, 1777~1861)의 증손자인 류동저(柳東著, 1892~1948)와 혼인했다. 맏사위 김용환은 1919년 3 · 1운동 이후 만주망명길에 올랐다가 압록강을 건 너기 직전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후 고향으로 돌아 왔다. 그는 1921년 결성된 의용단(義勇團)에 가입해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만주 독립운동 단체에 군자금 을 모아 보내다가 1922년 11월 일제경찰에 발각되 어 다시 붙잡혔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 되었다. 둘째 사위 류동저는 1920년부터 안동청년 회,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등 안동지역 사회운동 에 참여하였다. 이중업 · 김락 부부의 항일투쟁은 항일의병, 자정순 국과 만주망명, 그리고 3 · 1운동과 파리장서운동, 제 2차 유림단의거와 군자금 모집 활동 등 1890년대부 터 1920년대까지 이어지는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 다. 안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 예연구사로 근무했다. 현재 한국근현대사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안동대학교 에서 한국근대사를 강의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이육사의 독립운동 자료집』 (공저, 이육사문학관, 2018), 「경주 출신 손진형의 생애와 독립운동」(《국학연 구》 41, 2020), 「경북지역 향촌지배층과 전기 의병장들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한국근현대사연구》 80, 2017) 등이 있다.   필자 신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