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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④ 91 소식을 들었다. 길거리의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며칠 전에 일인(日人)이 촌에 들어와서 한인의 호구를 한 집도 빠짐없이 조사하더라’고 한다. 저들[일본 사람들]이 우리 한인에 대한 정책이 세밀 하기가 이와 같은데, 우리들의 지혜와 준비가 모자라 니 무슨 수로 이 사면에 둘러친 그물을 풀 수가 있을 것인가? 10일 두릉(杜陵)에 사는 이병삼(李炳三)이 방문 하였다. 한번 보자마자, 마음을 기울여 겉과 속이 조 금도 다름이 없으니, 진실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듣건대, 그의 아들 이장녕(李章寧)이 5~6일 전에 고국 으로 출발하였는데, 마차를 타고 안동현(安東縣)으로 갈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 행로에 마땅히 중도에서 마 주쳤을 것이나, 끝내 서로 교묘히 엇갈려 버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관전성(寬甸城) 남쪽에서 눈에 발이 묶이어 출발하지 못하고 있을 때 양산을 펴고 수레에 앉아 객점 앞을 지나가는 자를 보았었는데 혹 그 사람이었을까? 11일 조카 문형이 밖에서 들어와 전하기를, “청 나라 순검(巡檢) 2명이, 경내에 거주하는 한인이 몇 이나 되는지를 향약소(鄕約所)에 캐묻고, 만약 머리 를 땋고 중국옷으로 바꾸어 입지 않고서 입적(入籍)한 다면 모두 한꺼번에 쫓아내어 여기에 붙여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리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향약장이 내일 회의를 열려고 한다. 대개 만주의 풍속에 각 촌에 향약을 두는 것이 중 국 본부의 보갑(保甲 : 중국 전통 시대의 작은 지방 자 치제도)과 마찬가지로 백성의 소송을 다스리며 또 납 세의 사무를 관장하는데, 연한이 정해져 있어 기한이 돌아오면 공공의 선거로 뽑는다. 그 밖에 부장을 두어 각 촌의 향약이 절도나 기타 범죄의 재판을 통할케 한다. 우리나라에서 이주해 사는 사람 또한 토속에 의 거하여 각 촌에서 향약을 구성하게 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이 일을 김형식에게 물으니, 김형식이 대답하기를, “살 곳이 아직 정해지지 않아 나그네와 다름없으니, 우선 전지(田地)와 집을 매입하고 이사할 날이 확정되기를 기다려 의견을 진술하겠다”고 한다. 12일 눈바람이 매우 차다. 대개 이곳은 산이 높 고 재가 험하여 평소에 온기가 퍼지지 못하는 지형이 다. 항상 음기(陰氣)가 있어 겨울에는 눈이 많고 매우 추우며, 여름에는 구름과 안개가 늘 걷히지 않아 산꼭 대기의 햇빛이 구름과 안개 위를 내리쪼인다. 그 때문에 습한 날이 많아 찌는 듯한 더위가 혹심 한 것이다. 이제야 농사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것이 다만 사람들의 지혜가 비루할 뿐만 아니라, 기후가 적 당하지 않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겠다. 식후에 개성 사람 장유순(張裕淳)이 찾아왔다. 차림 새가 어디를 급히 가는 길이라 선 채로 몇 마디를 나 누었으나, 근후하고 정성스러운 뜻이 표정에 환히 드 러난다. 13일 평해의 윤인보(尹仁甫)가 고향으로 출발 하는 편에 집으로 편지를 써서 부쳤다. 이명세가 산 당의 제사에 참사하고 돌아오더니 말하기를, “임경업 (林慶業) 장군이 일찍이 이곳에 큰 공적이 있어서 만 주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낸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임장군은 우리나라 병자호란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