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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국립서울현충원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 탐방 79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구체적인 개헌논의가 이 루어졌기 때문이었다. 1993년 문민정부라는 자 부심 속에 등장한 김영삼 정부가 ‘역사 바로 세우 기’ 차원에서 국립서울현충원에 임시정부요인 묘 역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도 1987년의 6월 민주 항쟁이 만들어낸 민주주의의 확장이 있었기 때문 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써 '3 · 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이라는 헌법정신 은 45년 만에야 비로소 현충시설에 공식 반영되 었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의 조형물에 새겨져 있는 ‘民族正氣(민족정기)’라는 글씨는 김영삼 당시 대통 령이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한 자부심을 담아 직접 썼다고 한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제2대 임시대통령 박은식 과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령제로 바뀐 후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홍진·양기탁 등 네 분의 묘를 비롯하여 총 열여덟 분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없는 임시정부 요인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임정의 상징적인 존재 백 범 김구 주석의 묘가 없다. 백범 김구는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임시정부가 1927년 국무령제를 폐 지하고 주석제를 채택한 이후 초대 주석으로 취임했 던 석오 이동녕 역시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임정 부주석 김규식, 대한 민국 헌법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조소앙, 백범 김 구의 오른팔 격이었던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 등의 묘도 없다. 이들은 6 · 25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북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서울현충원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무후선열제단 제일 왼편에 위패로만 모 셔져 있다. 1942년 임 시 정 부 에 합류해 군 무 부 장 을 맡았던 의 열 단 의 김 원 봉 은 남과 북 어 디 에 서 도 무덤의 흔 적조차 찾 을 수 없다.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우리의 아픈 현 대사는 위대한 독립운동가를 우리의 기억에서 지우 려 했지만, 다행히 김원봉은 영화 ‘암살’과 ‘밀정’을 통 해 시민의 가슴 속에 되살아났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임시정부요인 묘역 위에 있는 대한독립군 무명용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스코필드와 통역사  목원홍 ‘밀정’ 포스터 ‘암살’포스터. ‘암살’은 1270만  여명 관객이 관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