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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순애 선생 55 납입 외 매년 1원 이상 무제한의 후원을 동 포들에게 강력하게 호소하였다. 임시정부는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로 오랜 유랑 시기를 거친 끝에 1940년 9월 중국 서부의 충칭(重 慶)에 안착하였다. 충칭에서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재중자유 한인대회 선언문 발표 김순애는 충칭에서 조선민족혁명당 중앙 위원, 감찰위원을 맡아 김규식 중앙집행위 원회 주석과 함께 활동했다. 이와 함께 1943 년 2월 충칭의 각계각파 부인 50여 명과 함 께 여성계 통합을 추진해 한국애국부인회 재 건대회를 개최했으며,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다른 간부로 부주석 방순희 · 서무부 최 소정(崔素貞, 최선화)·조직부 연미당(延薇堂)· 훈련부 정정화 · 선전부 김윤택 · 사교부 권기 옥 · 재무부 강영파 등이 선출되었다. 재건애국부인회는 임시정부와 직접 연결 된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결성한 조직이었으 며,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하는 여성단체의 대통합이 목표였다. 한국애국부인회는 홍보 를 중요활동으로 여겼다. 또 한국광복군에게 위문품을 지원하였고, 싱가포르 포로수용소 에서 풀려난 한국인 위안부 여성 10여 명을 인계받아 치료하고 재교육하여 독립운동에 동참시켰다. 1943년 3월에 개최된 워싱턴회담에서 영 국과 미국 지도자가 2차대전 후, 한국을 독립 시키기 전에 국제 감시보호 하에 두기로 합 의했다는 신문기사가 보도되었다. 이에 반발 하여 한국애국부인회는 5월에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등과 함께 재중국 자유한인 대회를 개최하여 한국의 완전독립을 주장했 다. 이 때 한국민족 완전독립, 임시정부 승인 등을 골자로 하는 4개항의 재중국 한인대회 선언을 채택하여 국내외에 거족적 결의를 공 표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 1차 환국 때 김규식과 함께 귀 국하였다. 귀국 후 조선부녀신생활사 사장, 민중동맹과 민족자주연맹 등에서 활동하였 다. 1946년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의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76년 5월 17 일 서울에서 영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을 추서하였다. 동지 권기옥(우측 두번째) · 방순희(우측 첫째) 등과 함께한 김순애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