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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97 생이 교육 구국운동을 펼치자 거기에 적극 동참했다. 안동에서 계몽운동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중등 과정인 3년제 협동학교를 1907년 설립할 수 있었다. 협동학교는 영남사회가 변하는 교두보였다. 유림의 압력과 예천의병의 공격도 있었지만, 협동학 교 는 신지식인, 젊은 지성을 육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전국에서 주목받는 학교였으므로 어려움 을 겪을 때 서울의 신문에서 격려하는 글이 게재되기도 했고 신민회에서는 교사들을 파견했다. 만주에서 경학사, 신흥강습소와 신흥무관학교 김동삼은 협동학교를 경영하는 한편, 비밀결사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했다. 겉으로는 협동학교에서 인재를 키우고 속으로는 독립군 양성을 위한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조약으로 나라가 망하자 김동삼 선생은 만주로 이주해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 고 독립군을 키워 국내로 들어오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먼저 족제(族弟) 김만식과 함께 만주로 가서 독 립군기지 건설에 필요한 조사를 하였고, 좋은 장소를 물색한 김동삼 선생은 가족과 친지, 사돈 집안 등 15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향했다.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한 그는 우선 신흥강습소를 설립하고 경학사 결성에 참가했다. 독 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서는 경제와 교육기반이 다져져야 했기 때문이다. 경제 기반을 닦는 곳이 경학사이고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이 신흥강습소였다. 김동삼은 1913년에 신흥학교, 1914년에 백서농장을 건립하고 신흥학교 졸업생들과 분교의 노동야학 졸업생 등 385명을 인솔해 통화현 팔리초에서 독립군 군영을 창설했다. 백두산 서쪽에 자리 잡았다고 ‘백서’라는 이름을 붙이고, 군사 기반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농장’이라고 위장했다. 무오독립선언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독립단체로 변모 1919년 2월 1일 길림에서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됐는 데 김동삼 선생은 민족대표 39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서명했다. 그와 동시에 독립항쟁전선이 새롭게 정비됐다. 부민단을 한족회로, 신흥중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 하는 등 군정부를 구성했다. 처음에는 정부조직으로 추진됐으나 임시정부에서 파견 된 안정근과 김병헌의 제의로 군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 부 관할하의 서간도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로 개편했다. 서로군정서는 다른 독립군과 연계해 만주로 침공해온 일 본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선도적 역할을 하며 청산리전투 김동삼 선생이 국민대표회의 의장에 선임되었다는 기사 (독립신문, 1923년 1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