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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영남 지역으로 이동하여 항쟁을 계속하였다.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노응규 의병장은 함안·마산·진해 등지의 의병을 합쳐 한 때 1만여 명 의 의병을 이끌었다. 진주성을 공격하여 탈환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진주 인근 세력을 모아 진주 의병진을 구성하여 김해까지 손에 넣었으나 관군과 결탁한 내부 배신자 때문에 진주성을 함락당 하고 말았다. 충청도 홍주에서는 김복한, 안병찬, 이설 등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강원도에서는 민용호 의병장이 활동하였다. 경상도 안동에서는 김흥락 지휘장 아래 권세연 등이 안동관찰부를 점령하였 으며, 전라도 광주에서는 기우만, 기삼연 의병장이 활약하였다. 의병들은 충주 등 주요 도시를 공격하는 한편, 친일 관리와 일본인들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아관파 천으로 친일정권이 무너지며 단발령이 철회되고 고종이 “이만하면 우리의 의지를 세계에 알렸으니 해 산하라”며 해산 권고조칙을 내리자 의병 항쟁은 점차 수그러들었고 의병들도 흩어졌다. 하지만 일부 농민들은 활빈당, 동학당, 서학당, 남학당, 영학당 등 농민 무장 조직을 결성하여 반봉건·반침략 투 쟁을 지속하였다. 이를 광무농민운동이라 한다. 외교권 박탈에 의분을 참지 못하다 | 을사의병(중기)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우리나라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영국과 미국의 세력을 등에 업은 일제는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경운궁에 일본 특사인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군들 그리고 대한제국의 대신들이 모였다.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자 마련 된 자리였다. 일본군이 둘러싼 강압적인 분 위기 속에서도 한규설을 비롯한 몇몇 대신 들은 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하였지만 궁 궐을 포위한 일본군의 무력시위와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 굴복한 을사오적이라 불리 는 이완용, 권중현,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등이 찬성하여 결국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말았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제는 감독기 구인 통감부를 설치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