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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2월31일 일요일 8 (제204호) 특 집 박우승 장로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충남예산군대술면농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조 의촌 공(휘 안제, 安悌)께서 뿌리내 린터전이다.400여년간대(代) 를 이어 살아온 선인들의 풍미 (風靡)한 체취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곳이다. 나라 잃은 서러움이 가득한 시기, 일본은 우리말까지 말살 하려는 정책을 펴고 있는 때다. 학자의따님으로태어나언문으 로 이웃 아낙네들의 편지를 써 주고읽어주던자상한어머님의 모습을 보았고, 사랑채에 서당 을 차리고 자손 글공부를 시켜 주신할아버님덕분에천자문을읽는등할아버지의보호아래유 년시절을유교가정에서지냈다. 아버지(휘 원종)는 집안을 위하여 객지에서 사업을 하시고 어 머니는 14세 때 성씨가문 학자 집 따님(성응례)으로 사대부가 신 부수업을받으시고가난한집차남이신낭랑따라시집와서시부 모뫼시고길삼을하면서38세에낳은아들하나만을쳐다보고살 았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어머님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대전사범학 교에들어갈수있었다.그러나배재중학교입학금을내지못하고 특차로 지원한 대전사범학교로 진로가 바뀐 상처는 어린 마음에 감당하기어려웠다 대전사범학교 4학년 때 6븡25 전쟁을 만나 또 한 번의 어려운 사 회 변동, 약소민족의 국란 속에 헤매게 되던 때에 기독교 하나님 은햇빛이었다.그리고생애큰변화이기도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와 6·25 동란에 보릿고개 등 힘든 고난 의시대를지나왔다.우선먹고살기어려워아이들은교육을받지 못했다.문맹국가라할수있는것이다. 청년박우승은파란 많은풍파 속에서어머니가평생소원하시 던 변호사의 길과 비슷한 농촌계몽운동가를 목표로 17세에 기독 교로 개종하였다.이어 야학당을 세웠고,은인을 만나 더 나은 농 촌운동가가 되기 위하여 연희대학교 신학과로 진학하고 농촌계 몽운동과 YMCA활동 등 사회사업분야 공부와 빈민구제운동을 하였고,20살에농촌에중학교를세우고고학을시작하였다. 예산의대술국민학교(현초등학교)를졸업하고당시어렵다는 대전사범학교를 나와 예산농업고등하교, 연희대학교 신학과 졸 업 후에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에서 사회연구에 전념하였 다. 이어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농업경제로 박사과정을 수료하 고 미국 중서부 최고의 명문대학인 미드웨스트대(Mid WestUni versity)에서 교육학 박사,미국콜롬비아대학에서 명예교육학 박 사를받는등학문적으로최고의과정을마치고특별히대한민국 건국에기초를세운지도자(이승만,윤치호,신홍우,안창호,윤봉 길등)연구에깊은학문적조예를가졌다. 1972년 온양에 있는 학교법인 한올학원 온양한올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일생의 3대 목표인 첫째 교회사업,둘째 교육사업,셋째 사회사업중에서교육사업을시작한것이다. 한올의 정신은 ‘한’은 하나,첫 것,한 개의 아주 큰 것이란 뜻이 며, ‘올’은 미래지향적이고, ‘올곧은 한 가닥 올바른’이라는 뜻이 있다. 1954년농촌운동을하던청년(박우승)이농촌에어려운학생들 을중등교육시키고자설립 한것이었다.1970년 폐교위기의중학 교를경영인수받아사재를들여시설을확정하여중학교를재설 립하고, 1972년 지방도시인 온양에서 고등학교를 병설하고 실업 교육을 시작하여 현재는 보통교육을 하는 학교로 발전 확대되어 중·고2,500여명의학생이재학하고있는학교로발전되었다. 1976년학교장이되어2018년6월30일까지봉직하며수많은후 학을길러내는등교육사업에헌신하였다. 박장로는어려서부터부모님과조상의묘를자주찾았다.특히 어머님께서는어린아들손을잡고성묘하는법을가르치며가문 의역사를알려주었다.이때의교육은90세를맞은지금도잊지못 한다. 농리 마을에서 문과급제자가 두 분이 나셨고 모두 승지(承旨) 가 되었다.어머님은 늘 “너도 그분들과 같은 훌륭한 어른이 되어 문중을빛내야한다.”고말씀하셨다.그후1975년 어느 날 송월당 공파 종친회 회장을 맡고 있는 남종(南鍾) 족숙(族叔)께서 부회 장으로 부르심이 인연이 되어 밀양박씨 규정공파 대의원과 의곡 공 종친회장이 되었다.그리고 2008년에는 의촌공 문중의 회장을 맡았다. 종친회장을 맡은이후로 원칙과신뢰를기본으로 한투명한운 영의방침을따랐고,종원들은무한한신뢰를보냈다.그러나사실 은 처음 ‘예수쟁이가 무슨’이런 수식어가 따라다니기도 했다.종 중의 선산이 제3자에게 양도된 사건이 있었다. 이때 빈약한 종중 에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이때 박 장로는 종 중원의 요청에 따라 변호사를 선임하여 되찾음으로서 예수쟁이 라는말은사라졌다. 송월당공(휘 호원)으로부터 시작된 가문의 흥기(興起)는 아들 의곡공(휘 정현), 손자 안효와 안제에 이르기까지 3대(代)4명의문과급제는보기드문사 례로 명문가의 반열에 오를 일이었다. 송월당공은호조판서를세 차례나역임 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한 번도 고친 적이 없어 비가 새는 초가에서 자 손들 훈육에 정성을 쏟았고, 의곡공께 서 승정원 주서(主書)로 있으면서 사사 로이기록한16년동안,1060일에무려1 ,087건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사건들 이사후(死後)에‘승정원일기(承政院日 記)’의 초책본이 되어 25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국보 제303호로 지정되었 고,의촌공은 성균관에 제임 할 때 사림 (士林)에서 영수(領袖) 로추대하여폐모론에소 수(疏首)가 되어 태학생 들을이끌고항거하는소 를올리는기개있었다. 우리말에 정승판서가 되었어도 후손들이 현창 하지못하면뭍이고생원 진사를 하였어도 후손들 이 적극 나서 현창하면 정승판서보다낫다는말 이있다. 박장로는 의촌공묘소 에 12지상을 조각한 둘레 석을설치하는사초를하 여 일신했다. 그리고 의 곡공일기를초책으로한 ‘승정원일기’가 국보로 지정된것과유네스코세 계기록유산에 등제된 것 을기념하는기념비를마 을 입구에 세웠으며, 강 원감영문화재 행사에 강 원관찰사를 지낸 의곡공 (휘 정현)을 알리기 위해 적극참가했다. 그리고선대 행적과유 집,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박정현 일기 등을 모아 ‘송월당삼대(松月堂三代)&밀양박 씨박호원가문에핀어사화’를시조시인이자성균관부관장인박 영록현종과함께책을펴내는등현창사업을적극펼쳐선조의음 덕에 보답하는데 후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있어 주변의 화제 다. 충남 예산군 대술면 농리는 규정공의 13대손이자 송월당공의 손자인 의촌 박안제 공이 뿌리내린 터전이다.의촌공께서 해미현 감으로 부임하여 이곳에 농장(農庄)을 마련하고 터전을 일궈 부 모를봉양하고부터지금에이르기까지400여 년간대(代)를이어 살아온선조의채취가묻어있는곳으로잊지못한고향이다. 오늘의 박 장로를 있게 한 곳으로 선조의 음덕을 기리고 선영 (先塋)을 돌보며 일가 간 친화(親和)의 길을 넓힌다면 비바람 눈 서리가 아무리 무상(無常)타 해도 호젓한 산간벽촌 중리는 영겁 (永劫)의 광음(光陰) 속에 밀박(密朴)의 고토로 남을 것이란 확 고한신념을갖고생활한다. 대술면일대에종중에서는광활한임야와농토를갖고있다.그 리고 남에게 팔려 넘어갔던 농장(農庄)터전을 사재를 들여 매입 하기도했다.선조의채취가서려있는것을오롯이지키려는것이 다. 의곡공,의촌공선조께서는많은시문을남겼다.그리고박장로 는 80세에 늦깎이 시인으로 등단하여 제19회 짚신문학상 외 다수 의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하였으며,저서 수필집 븮승리븯,시집 븮먼 하 늘바라보며븯등다수의시문학을발표한바있다. 이에선조의주옥같은시와박장로가남긴시를돌에새겨시문 학관을세우고,국보로지정된선조의일기와명문가로성장한종 중사를정리한기념관등을세워나갈계획을갖고있어그꿈이이 루지 길 기대하며 저서 ‘송월당삼대(밀양박씨 박호원 가문에 핀 어사화)’와송월당삼대를소개해본다. 박장로는 명 문의 자손으로 태어난 것을 항 상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왔 다. 특히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헌신에 항상 감 사하며 어머니 에대한채취가서려있는모든것을대중과교류하며소통하고자 한다.특히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그린 시(詩)‘사모루思母淚’(지 난11월호9면)는부모님에대한지극한효성을엿볼수있다. 이처럼 효심이지극한박장로는선대에서남기신 귀중한자료 들이 오랜 세월 속에 산실되고 여러 차례의 병란(兵亂)으로 소실 되었던 까닭에 선조들의 찬란한 환로(宦路)에 비해 남겨진 것이 너무적다는아쉬움에족질흔병(昕秉)이세전(世傳)해오던븮의 촌사고븯(義村私稿),븮둔촌사고븯(遯村私稿),븮간은한영븯(艮隱閑詠) 과필자미상의행장과제문을기록한필사본1권을포함하여4권 을조건없이주면서잘보전하라고당부했다.이러한서적을통해 우리조상의행적을조심스럽게밝히게되어너무기뻤다. 이에 2014년 여름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며 전 국사편찬위 원회 위원장 성고(省皐) 이성무(李成茂) 박사와 만나는 자리에 함께 한 박영록(朴永祿) 시조시인과 승병(勝秉) 족질에게 이 책 자발간에대해자문을구하고의촌문중대의원들의의견도청취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하여 발간작업에 착수하였으나어떻게하면알찬내용의책이될수있을까하는것 이문제로떠올랐다. 고심 끝에 낙촌공 후예인 박영록 시조시인과 공저하기로 하고 결심한 후에 의논하여 게재 순서를 정하고 제1편 송월당 삼대 과 거급제,제2편돈절리에뿌리내린박안제,제3편선대문헌록,제4 편 박씨 선원보감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그리고 조상들의 빛나 는 삶과 유산으로 전해오는 문헌과 유서,가훈 등을 정리한 이 책 에담긴뜻을소중하게헤아리고선조들의얼을되새기며천세만 세번성하는문중이되기를바라며,후손들이선조에대한존경심 과자긍심을가지고부끄럽지않은삶을살아가는데보탬이되었 으면하는마음에서심혈을기울였다. 그리고이책은발간이후한가문의유문(遺文)이아닌조선시 대과거제도등시대상을알수있어많은사람들이애독하는필독 서가되었다.이에종원들에게도보급을위해구입을희망하는성 손들에게 무상공급(택배비 본인부담)키로 했다.(희망하는 성손 들은본보에문이요함) 밀성군박광영의손자이다.20세에진사가되고명종임자년문 과에 종형 인원(仁元)과 근원(謹元), 종질 계현(啓賢)이 함께 급 제하여 동방(同榜)하였다. 왕명을 받고 용강현령으로 내려가 백 성들을 기근(飢饉)에서 진휼하고 임술에 황해도의 난민을 토평 (討平)하여공을세웠다. 비변사에 있을때는 임금의 명을 받고 유극량을 천거하여 임진 왜란때공을세웠으며,한림학사를지내고도승지를거쳐호조판 서와 좌참찬이 되었다가 사후에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관직 에 있을 때에는 청렴 검소하였고, 물러나서는 겨우 수간 초가에 거주하였으나그집도수리한점이없어처음과같았다. 송월당공의넷째아들이다.27세에알성시(謁聖試)에급제하여 승문원에들어갔다.기축(己丑)에문관들의정시(庭試)에서장원 을 하고 친시(親試), 화어(華語)에서도 으뜸을 차지했다. 승정원 주서로 있으면서 사사로이기록한16년 동안,1,060일에 무려 1,08 7건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사건들이 사후(死後)에 <승정원일 기(承政院日記)>의 초책본이 되어 25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국보 제303호로 지정되었고,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또한충청관찰로있을때규정공파족보의목판본편 찬작업을 집접 지휘하고 서문(序文)을 지어 족보의 규범을 이루 고 뿌리를 확실하게 하였으며, 규정공의 연계세보(聯系世譜)를 체계화 했다. 형조판서를 지내고 지돈령부사로 기로소(耆老所) 에 입사하였으며, 아들 안제(安悌)의 공훈으로 좌찬성에 증직되 었다. 의곡공의 큰아들이다.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익위사세마 (翊衛司洗馬)가되었고,29세丙辰에문과에급제하였다.삼사(三 司)를 거쳐 도승지와 여러 고을의 부사와 목사를 역임하였다. 인 조 을유(乙酉)에 봉상시 정(正)으로 좌의정 송서봉의 제문을 지 어<학곡집(鶴谷集)>에전하고있다. 의곡공 박정현(鼎賢)의 둘째아들이다. 22세에 진사가 되었고, 성균관에 재임 할 때에 사림(士林)에서 영수(領袖)로 추대하여 폐모론(廢母論)에 소수(疏首)가 되어 태학생(太學生)들을 인솔 하고 항거하는 소를 올리는 기개가 있었다.태학(太學)에서 공부 하며대과(大科)를대비하여사육문체(四六文體)의 표문을지었 으며,신유년정시문과에장원급제하였다.인조반정초에다시등 용되었으나 봉양(奉養)을 자청하여 해미현감을 제수 받아 관리 를단속하고백성들에게선정을베풀어군민들이비를세워부자 (父子)의두비(碑)가지금도남아있다. 옥당(玉堂)에 들어 서연(書筵)과 진강(進講)강에 참여하여 의 리(義理)를 논변(論辨)하였고, 육진(六鎭)의 폐막(弊 晩 )을 상소 하였는데,군량의 충족과 기구이 수선,학교 건립과 과거실시,인 재를 거두어 쓰고 어사를 보내어 순무하는 것 등 6가지 일을 진술 하였다.늘태연하고다급한언사나기색이없었으며,단정히방에 앉아 종일 채을 보았고,언제나 나태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요 란하고 호화스러움을 좋아하지 않아 자제들이 화사한 복색을 가 까이 하지 못하였다. 지위가 초옥(貂玉 담비 꼬리와 옥으로 장식 한의관으로顯官을뜻함,즉높은관직)의반열에있었으며,누차 큰고을을맡았으나집에는조그만곡식의비축도없었다.기국이 엄정하고일에임하면여유가있어가는곳마다관직생활을잘하 여병조참의가되었다. 우리나라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양반관료 사회에 조선 중 기천주학(天主學)이들어오면서개신교는크게박해(迫害)를받 아왔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유교를 숭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곱지않는시선이뒤따른다그러나박우승장로를만나면서개신 교를추종하는사람에대한인식이바뀌었다. 무엇보다도 종중에 적극적이고 선조 현창을 위해 ‘송월당 3대’ 의 책을 간행하고 400여 년 세거지인 고향땅에 선조의 체취를 엿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 노력하는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 다. 대체로인물을평가할때도덕과학문,충효,문장,훈업등을꼽 는다. 박우승장로는이중하나도뒤처지지않음을알수있다.어머니 와 조부를 통해 학문을 충실이 닦았고, 특별한 국가관과 선조에 대한 지극한 효 사상에서 우러러 나오는 종중 관리, 주옥같은 시 문을통해사회를밝게한가운데평생교육자의길을걸어온삶은 주변에서찾아보기힘든삶이라하겠다.그리고국제활동을통해 서도 이름을 크게 떨쳤다. 1976년 2월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실 행위원, 임원회 서기 등을 담당하면서 세계기독교협의회(WCC) 총회한국대표및세계감리교실행이사를맡고있을때‘LA폭동 시한미교회대책협의회’3인위원중한분으로큰역할을담당한 것은 역사적으로 남을 업적으로 기록된다.이밖에도 몽골 올란바 토로 YMCA 창립시 한국YMCA이사장으로, 재일본 한국 YMC A 이사,북경,청진 YMCA 회관 개관식 힌국대표,국제로타리클 럽 3620지구 총재, 세계감리교회 총학장 한국대표로 아시아태평 양지역 기독교학교협의회 한국대표, 한국평신도 세계협의회 총 재로국제적인활동을하는등큰족적을남겼다. 이제 박우승 장로는 우리나이로 90세를 맞았다.교회 장로이면 서학교법인한올학원의이사장으로,평생어머니를잊을수없어 세운한올어머니문학관관장으로어느순간쉴틈이없음에도선 산을 누비며 더 발전하는 종중, 더욱 빛나는 가문을 위해 노력하 는모습에응원을보낸다. /글·사진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한올중·고등학교설립자 박우승장로 <밀양박씨규정공후의곡공·의촌공종친회장> 90세의고령에도현역에서아이들을지도하고있는박우승장로 뱚종친탐방 어사화(御賜花)는 조선시대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 에게임금이내린종이로만든꽃이다.이는실제아욱 과에딸린꽃으로,2m정도기다랗게자라는대에커 다랗게둥근꽃이줄줄이피는모양을보고그모양이 흡사접시처럼생겼다고해서접시꽃이라부른다.다 른이름으로는어사화(御賜花)라한다.과거에급제한 사람이합격증서인홍패를받을때위에서내리는꽃 이 바로 이 꽃이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이 꽃을 받은급제자는이것을복두( 빱 頭)위에꽂아서활대처 럼휘어드리우고다녔다. 송월당 박호원(朴好元)과 아들 정현(鼎賢),손자 안 효(安孝)와 안제(安悌)등 삼대가 잇달아 과거에 급제 한하면서어사화꽃은명문가의신호탄을올렸다.이 에 박우승 장로는선조의 명성을 드높이는현창사업 에매진하고의곡공·의촌공종친회장으로종중의기 초를단단히하며후세에까지명성을잇게하고있어 혹자는“그분교회장로맞아?”하는분이있다. 문맹퇴치를위해야학을세우고훗날온양한올중·고 등학교를 설립하여 평생을 후진양성에 매진하였고, 전국기독교장로협의회장,교육학박사등다양한이 력을갖고있으면서‘송월당삼대’책을발간하여선조 를현창하고가문을빛내고있어찾아가본다.이날취 재는본보효이야기를집필하였던박영록성균관부 관장이동행하였다. 나라잃은유랑민족의소년햇빛을보다 인자했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지은 ‘비단짜는 어머니’ 한올 어머니문학 관 문맹 퇴치를 위한 청년의 삶 평생교육자의길을걷다 온양한올고등학교전경 지극한효성으로선조의음덕에보은하다 의촌공묘소,충남예산군대술면농리.12지상을조각한둘레석을사재를들여설 치했다. 선조의명성을드높이는현창사업펼쳐 기념비 400여 년 전 뿌리내린 터전에 어사화의 결실을 송월당삼대 (밀양박씨박호원가문에핀어사화) ※본보구독자에게무상공급(택배비본인부담) 송월당공박호원(朴好元) 맺은말 의곡공박정현(鼎賢) 부사박안효(安孝) 의촌공박안제(安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