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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2월31일 일요일 12 (제204호) 기획 한성판윤은6조판서와같이정2품으로정경(正卿)의반열에있는고위직이다.특히수도행정을관장하는지방관서 로서외관이자국왕이상주하는중앙으로서경관(京官)의특성을갖고있어한성 판윤은그직임과권한에특수한성격과위상이있어제1대성석린에서부터제2209대장현식까지의성향을보면주로 문신(文臣)관료들이맡아왔다. 그럼에도 제890대, 제880대 등 두 번에 걸쳐 한성 판윤에올랐다. 그러나함녕군은영조조에극심한당파싸움의희생양이되기도한다.영조3년무신년의이인좌의난을평정하고분 무공신2등에올랐으나반면1755년나주괘서사건으로벌어진을해옥사사건에 연루되어참형을당하면서생을마감한다.이후후손들이신원(伸寃)운동으로순종원년(1907)정미년(丁未年)에신원 되어관작또한추복되었다. 함녕군박찬신(朴纘新,1679-1755)은조선중기무 신으로 자는 군술(君述)이다. 아버지는 절충장군 (折衝將軍) 전행충무위부호군겸내금위장(前行忠 武衛副護軍兼內禁衛將)증좌찬성함풍군(咸 銀 君) 박종발(朴宗發)이고 대대로 공신이며 무반집안의 어머니 증 정경부인 公州鄭氏(부 정흥주)사이에서 장남으로충청남도덕산현에서출생하였다.공은함 양박씨 시조 상서공의 21세손이요 세종 때 병판공 박습(朴習:兵曹判書)의 11대손이다.고조부는 유관 (由寬)으로 통정대부 풍덕군수 증 자헌대부좌참찬 이요.증조부는내형(乃亨)으로증통훈대부사헌부 집의요.조부는상경(尙絅)으로좌승지이다. 아버지 함풍군은 남인의 거두 명재(明齋) 윤증 (尹拯 1629~1711)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1681년(숙 종 7) 무과(武科)에 올라 중추원도사(中樞院都事) 에 제수되었다. 1696년 흥덕현감(興德縣監;현 청주) 으로 봉직(奉職)하며 정사를 깨끗이 하였고 그 뒤 내직으로 들어가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과 비변 사의낭관(郎官)이되고,1700년창원대도호부사(慶 尙道昌原大都護府使)로 다시나가민폐(民弊)를혁 파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어 순천영장 (順天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창원읍민들의 간청으 로그곳에계속머물러있다가內禁衛將(내금위장: 종2품) 으로 발탁되었다. 후에 어장공의 후의로 증 순충적덕보좌공신(純忠積德補佐功臣)숭정대부의 정부좌찬성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世子貳師) 오 위도총부 도총관(五位都摠府 都摠管)이 되었다. 동 생은박재신(朴再新)븡박태신(朴泰新)이다. 부친함풍군이무과에급제하며군인의길을걷다보 니자연스럽게공을포함한세자녀들도성장하면서문 과보다는 무과에 더 많은 관심과 경험을 하게 되었고 공 과아우들(재신,태신)도모두무과에급제하게된다. 공의 성장기(숙종5년~영조 31년)의 시대적인 정 황(政況)은 격렬한 당쟁을 벌였던 17세기를 넘기면 서끝을보지못한당쟁이계속되었다.당쟁(黨爭)의 양상은 상대 당파를 살육(殺戮)하는 것으로 나타났 다.숙종(肅宗)대에 명재 윤증(尹拯)은 상대 당파와 의 화해를 주장했으나 무산되었고, 경종(景宗)대에 는 드디어 당파의 이해에 따라 국왕까지 부정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경종 독살설(毒殺說) 속에 영조 (英祖)가즉위했으나소론(少論)과남인(南人)들은 영조를 부인했다. 영조는 집권과 더불어 당쟁을 막 고, 당파 간의 정치적 균형을 도모하기 위한 명분으 로탕평책(蕩平策)을前位에두었다.이는영조가일 찍이당쟁의폐해가나라에미치는악영향을실감하 였으며, 당화가 몰고 온 악재를 직접 경험한 장본인 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탕평책(蕩平策)은 국왕마 저 부인하는 극심한 당쟁을 완화시키려는 의지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그러나 영조가 경종 때의 과거사 에 매달리면서 탕평책 역시 한계를 드러냈고, 사도 세자(思悼世子)까지그희생양으로만들었다. 공의 지역적 바탕은 충남 덕산현 출신으로 반 노 론적성향이강한지역으로당파로는소론으로분류 되어 있었다. 무신년(영조4년:1728) 정권에서 배제 된소론과남인의과격파가연합해무력으로정권탈 취를 기도한 사건이 李麟佐의 난이며, 이인좌도 소 론 출신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난이 발발했을 때 토벌(討罰)했던 주요장수 모두가 소론출신이라 는 점이다. 1등공신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환, 2등공신 도순무중군(都巡撫中軍) 박찬신, 종사관(從事官) 박문수 등이 소론출신이지만, 적극 가담하여 진압하고 모두 분무공신으로 녹훈을 받게 된다.공은인조(仁祖)때학행이뛰어나은일(隱逸) 로현실론적성향이강해원종추승을합리화하는데 앞장섰던 잠야(潛冶) 박지계의 종 5대손으로 소론 영수명재윤증(尹拯),백부 윤문거(尹文擧)의 외종 손(外從孫)이었다.따라서진외가당숙인윤증의영 향을받고자라서소론으로분류되었고노론에대한 적대감이깊었다. 당쟁이 심화되면서 정치적 배경은 수많은 질투와 시기와음모(陰謀)로점철되어공은여러차례파직 당하고회복되었다.만년에윤지의옥(尹志의獄:나 주벽서 사건)에 아무 죄 없이 연루되어 참화를 당하 므로 화려한 열력(閱歷)도 모두 불태워지고 소실되 어 묻혀버리고 말았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또한 공신은 초상화를 그려 충훈부(忠勳府)에 비치 하였 는데 녹권,초상화등도모두불태웠다.단지조선왕 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승정원일기, 각종 문집 등 에서 보이는 자료와 승지 경암(敬菴) 윤동수 (尹東 洙:1674~1739)가撰하고참판담운(淡雲)조명교(曺 命敎:1687~1753)가 篆한 부친 함풍군 종발의 神道碑 文에서찾을수밖에없었다. 공은 전주이씨 병조판서의 딸과 혼인하여 3형제 (태환,태협,태형)를 두었는데 장남 태환은 무과에 급제하고 전주이씨 공조판서(工曹判書) 백야(白 冶) 이중경(李重慶)의 사위가 되니 통혼으로 강력 한 가계집단과 인척(姻戚)관계를 확립하므로 탄탄 한 정치적 인맥이 형성되었으나 자손들 모두 공과 함께피화(被禍)를당하니한탄스러울뿐이다.공의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병조판서(兵曹判書)의 소생으로만되어있어정확히누구의소생인지알수 가 없다. 아마도 공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친가는 물 론 처가에도 피화를 당할까 두려워 역신(逆臣)집안 과 관계를 끊기 위해 강제 이혼(?)시키고 삭제하지 않았나생각이든다. 공은 함양박씨 유일하게 장신록에 오른 등단대장 이요무인으로한성판윤을2회에걸쳐역임하였는데 한성판윤은 주로 문관을 기용하고 있어 문인으로서 의학문또한뛰어났을것으로추정해본다.공의출사 는 23세(숙종28년 1702년)에 무과에 급제하면서 시 작되었고 부친과 같은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2 년뒤(1704년)부친함풍군은별세하였다.그뒤20년 동안 열력들은 보이지 않지만 정3품까지 승진하기 위해서는 전국 군읍(郡邑)에 부임하면서 영변현감, 종사관,사직,병마동첨절제사,수문장,도호부사,병 마첨절제사 등 내외 직을 두루 거치면서 맡은 바 임 무를성실히수행하였고하달되는군령과군정을통 솔하고감독하는역할을충실히하면서부임하는곳 마다승승장구(乘勝長驅)하지않았나사료된다. 실록에는 43세(경종1년 1721년)에 충청수사로 부 임한것이처음보인다.충청수사(忠淸水使)는충청 수군절도사(忠淸水軍節度使)라고도 하며 정3품 당 상관 외관직 무관 자리이다.부임한지 2개월이 되지 않았는데장령(掌令)송도함(宋道涵)이전계(前啓) 를 거듭 아뢰고,또 군읍(郡邑)을 거치면서 성품(性 品)에 문제가 있다고 논핵하기를 제기하였으나 상 이모두따르지않았다. 45세(경종3년 1723년)에 경상우병사(慶尙右兵 使)로부임한다.곧,경상도를우도와좌도를나누어 우도병사는 경상도 서부지역을 담당하는 육군 대장 이다.이로써공은수군의수사(水使)와육군의병사 (兵使)를두루거친다. 47세(영조1년1725년)에 장령이휘진(李彙晉)등으 로부터 박찬신은경종(景宗)초년(初年)에역적김일 경(金一境)븡윤취상(尹就商)븡남태징(南泰徵)의 일파 로몰려재차탄핵을당한다.1727년3월에박찬신은사 은을 입어 유배지에서 풀려났으며,모두 62명이 함께 석방되었는데대부분소론과남인출신들이다. 이와 같이 소론 출신들은 노론출신들에게 끊임없 이 모함을 당하여 멀리 귀양을 가게되고 보낼 것을 청하니 임금도 어쩔 수 없이 유배시키고 또 방면하 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결국 윤지의 난이 발생하면 서 노론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난 소론 강경파 “김일경의일”을다시끌어내어일파를모두색출하 여 제거할 것을 청하니 62명을 포함하여 500여명이 함께참화를피할수없게된다.이피화에무고로연 루되어 1755년(영조 31)에는 재차 역적으로 몰려 상 훈이삭제되었고,효시를당하였다.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 4)3월 정권에서 배제 된소론과남인의과격파가연합해무력으로정권탈 취를 기도한 사건을 말한다.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 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戊申年에 일어 났기때문에무신란이라고도한다. 1724년경종이죽고영조가즉위하는과정에서서 인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갈등이 커지자 박필 현(朴弼顯)·이유익(李有翼)·심유현(沈維賢)·정희 량(鄭希亮)등소론강경파는정권에서배제된남인 세력과연합해노론정권을무너뜨리기위한정변을 계획하였다.난의계획은1727년 정미환국으로온건 소론(완소:緩少)이다시기용되자,동조자의확대가 어려웠고 모의가 노출되어 봉조하(奉朝賀) 최규서 (崔奎瑞)의 고변을 비롯해 양성인(陽城人) 김중만 (金重萬)등이각지의취군(聚軍)동태를속속고변 하였다. 영조는 친국을 설치하고 삼군문(三軍門)에 호위를 명하였다. 한편으로는 오명항은 이내 금영 (禁營)을 겸임케 하여 사로 도순무사 (四路都巡撫 使)로 삼고 순토중군(巡討中軍) 박찬신(朴纘新)을 그대로도순무중군(都巡撫中軍)으로차임하며,영 남어사(嶺南御史)부교리(副校理)박문수(朴文秀) 로종사관을겸임케하니,이내즉시 내려가이 소추 들을 물리쳐 평정하고 백성을 안무(安撫) 토록 하 라.”영조가친히지시를내린다. 관군은3월24일안성·죽산의반군을소탕하고,이 인좌·권서봉·목함경(睦涵敬) 등을 생포하였다. 안 성·죽산에서의반군의폐보(敗報)는삼남지방의반 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청 주를 거쳐 4월초 추풍령을 넘었을 때에는 영남 지방 의 반군도 지방 관군에 의해 이미 소탕되었다. 이인 좌는 죽산의 정세윤 부대와 합류했으나 죽산에서도 토벌군에 패하자 산사로 도주했다. 하지만 죽산의 농민인 신길만(申吉萬)과 주민들에게 붙잡혀 토벌 군에 넘겨졌고, 5월 2일에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결 국봉기는20여일만에관군에게진압되고이인좌는 영조의친국을거친뒤5월5일에처형되었다. 이때공의나이50세에혁혁한전과(戰果)를올릴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무예(武藝)를 연마하고, 전략(戰略)을 위한 병서(兵書)와 의리(義理)를 존 중하는 경서(經書) 즉 강서(講書)를 탐독하고 연구 하였기에 가능 했을 것이다, 아울러, 부친 함풍군의 엄한 자녀교육과 지득(知得)한 경험과 노하우를 기 회가 있을 때 마다 소상히 전달함으로써 초석이 되 지않았나사료된다. 공이 영조(英祖)임금으로부터 이인좌의 난을 토 평(討平)하고분무정공신二等에록훈(錄勳을받게 되니,함양박씨에서 정공신은 중종조中宗朝 정국공 신(靖國功臣)으로박영문(朴永文;一等),박영창(朴 永昌:四等)형제와함께공이있을뿐이다 영조 4년(1728) 무신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에게는 분무공신(奮武功臣)의 공신호가 주어 졌다. 분무 일등 공신(奮武一等功臣) 오명항(吳命 恒)을봉하여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으로삼고이 어 우찬성(右贊成)에 임명하였다. 이등 공신(二等 功臣) 박찬신(朴纘新)을 함은군(咸恩君)으로 삼고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로 뛰어 승급시켰는데, 이삼과 군호(君號)가 같아 뒤에 함녕군(咸寧君)으 로 고쳤다. 박문수(朴文秀)를 가의대부(嘉義大夫) 로뛰어승급시켰는데,뒤에영성군(靈城君)으로삼 았다.정공신은모두15명이다. 영조4년 1728년 7월 21(50세) 박찬신(朴纘新)을 평안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박찬신이 앞으로 나 아가니, 임금이 말하기를,"서관(西關; 황해도와 평 안도)은 일이 중대하므로 마지못하여 경을 보낸다. 경을쓸데가있으면부르겠다."하였다. 영조6년 1730년 8월 19일(52세) 박찬신(朴纘新) 을 배왕대장(陪往大將)으로 삼았고, 11월 포도청의 책임자인 포도대장(捕盜大將: 종二品)으로 임명하 다. 영조7년 1731년 임자 9월 16일 박찬신(朴纘新)을 전라 병사로 삼았다. 영조9년 1733년 2월1일(55세) 처음 통제사로 부임하면서 남원을 지나다가 나그네 가 올린 백복사의 흉서를 보고 즉시 조치하지 않고 다음날 조치를 취했다고 파직하라 하니 우리는 이 사건을 어찌보아야할것인가?또다시 중상모략이 시작되었음을짐작할수있다. 영조10년 1734년 1월6일(56세)박찬신(朴纘新)을 황해 병사(黃海兵使), 영조12년 1736년 7월 2일(58 세) 박찬신(朴纘新)을 포도대장(捕盜大將), 영조13 년 1737년 3월 12일(59세)박찬신(朴纘新)을총융사 (摠戎使), 영조15년 1739년 2월12일(61세) 박찬신 (朴纘新)을 제890대 한성판윤에 올랐다. 1739년(영 조15년~ ) 헌부(憲府) 장령(掌令) 유건(柳 괜 )을 비 롯해 노론중심의 조정에서는 10번이상 탄핵을 주청 하고 전계(前啓)를 주청하니 임명 23일만에 체칙당 했다.이유는무신이었기때문이다.이후총융사,어영 대장(御營大將), 총융사(摠戎使:종2품직) 제수되었 고,영조23년정묘1747년2월27일(69세)에임금이친 히 영희전(永禧殿)에서 제사를 지내고 두루 충훈부 (忠勳府)에임어하였는데,이는대체로광묘(光廟)와 원종(元宗)이일찍이정사(靖社)븡호성(扈聖)의훈록 (勳錄)에참여하였고,〈초상화가〉충훈부에간직되어 있었기때문에임금이감회가일어나이런거조가있 었다. 기공각(紀功閣)에 나아가 여러 공신(功臣)을 선소(宣召)하였는데,분무 공신(奮武功臣)으로들어 와서참석한 이로는 단지 조현명(趙顯命)븡박찬신(朴 預新)븡김중만(金重萬)세사람뿐이었다.영조24년17 48년3월2일(70세)좌포도대장(종2품),영조28년175 2년 7월 12일(74세) 박찬신(朴纘新)을 특별히 제880 대한성판윤에제수되두번째판윤에올랐다. 나주괘서 사건은 지방에 유배 중이던 소론급진파 가 일으킨 것이다. 거병 모의 사건은 중앙의 무신이 나 공신까지 깊숙이 연결된 거병 계획으로 확대된 사건이다 윤지(尹志)의 난으로 불리는 나주괘서사건(羅州 掛書事件), 이하징(李夏徵)의 역모사건 또는 을해 옥사(乙亥獄事)라고도 한다. 윤지는 신임옥사를 일 으킨 소론계 강경파 김일경(金一鏡)의 무리로 지목 돼처벌받은윤취상(尹就商)의아들이다. 윤지는통제사김윤(金潤),전(前)전라좌수사박 재하(朴載河)와 나주 영장 윤상백,박찬신(朴纘新), 북병사조동하(趙東夏),민후기(閔厚基),민효달(閔 孝達), 김주천(金柱天), 이시희(李時熙), 이명조(李 明祚), 이양조(李陽祚) 등과 교류하면서 군량과 군 기를모았다는것으로함녕군은연좌되었다. 특히무신란을진압한공신박찬신의가담사실이 드러났다면서조정에서는들고일어난다. 1755년 3월 22일 충훈부에서 영조에게아뢰기를" 박찬신(朴纘新)의 성명(姓名)을 하루라도 훈안(勳 案)에 둘 수 없으므로 전례를 상고하니 공신(功臣) 으로 범역(犯逆)하여 삭훈(削勳)된 자는 반사 교문 축(頒賜敎文軸) 및 화상축(畵像軸)·회맹녹권(會盟 錄券)을 회수하여 모아 명정전(明政殿) 문 밖에서 태웠으며, 대내(大內)에 소장하고 있는 회맹축(會 盟軸) 및 회맹녹권은 꺼내도록 청하여 역적과 여러 아들의 성명을 삭제하여 버린 뒤에 대내로 들여 보 내되 자서(子 쉔 )·형제·질(姪) 등의 이름이 원종녹 권(原從錄券)에기재되어있는자역시가져다상고 하여 성명을 삭제하고 그대로 충훈부에다 간직하며 그 은사(恩賜)한 전민(田民)은 충훈부에다 도로 귀 속시켰습니다.청컨대 여기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소서."하니영조가윤허하였다. 함녕군박찬신선생은무반집안에태어나부친함 풍군의무인의길을본받고어머니의외가에서양반 가의훈육(訓育)받아사리에대한옳고그름을성장 과정에서몸소배우고실천하였다.부모에게효도하 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했으며 장남으로써 집안의 대들보역할을하였다. 공의 출사는 23세(종28년)에 무과에 급제하면서 시작되었고 동생(재신,태신)도 뒤따라 차례로 무과 에 급제하게 된다. 공은 그의 아버지를 닮아 무예가 뛰어났고,지략이출중하였으며전술가였다.그래서 배왕대장, 어영대장, 총융사, 포도대장 등의 친병관 리 업무를 담당하면서 제왕의 호위를 맡았다.영조3 년에이인좌의난이발생하였을때금위영중군으로 병력을 이끌고 토벌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워 같은 해 분무이등공신이 되고 함녕군에 봉해지면서 영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영조 시절에승진에승진을거듭해무관으로는드물게한 성판윤까지오르게된다. 언제충남덕산으로이주하게되었는지모르겠지만 덕산현에서는 공의 집안이 양반가로 벌열(閥閱)을 가 지고있었다.혼인은강력한가계집단과인척관계를확 립하는데있어서중요한수단이었다.곧통혼은신분의 상승과유지에조선사회에서정치적븡경제적출세의주 요한결정요인이었는데,혼인을통해서일반적으로는 가계집단,그리고구체적으로는후손들을위한엘리트 특권이 유지 및 강화되었다. 공의 집안이 소론집안과 외척관계를맺으며자연스럽게소론으로분류되면서 당쟁에휘말리게되니안쓰럽고답답할뿐이다. 공이 무과에 급제할 숙종 시기는 당쟁이 심화되어 옥사가빈번히발생되니죽고죽이는상황이지속적으 로 전개되어 상대가 무너지면 정권을 잡은 쪽은 살아 났다가 또다시 정권을 잃고 죽임을 당하는 악순환이 되었다.영조의탕평책은초기그럴듯하게전개되었지 만영조를임금으로추대한세력들(노론)은기득권을 가지고상대(소론)를겸용하여관직을적절히안배하 는 수준으로 전개되어 왕권의 강화를 도모한 것에 불 과했다.그러므로남인(南人)이대부분인경상도사림 중,특히진주합천거창함안고령성주등경상우도사 림의 관리 진출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억압 하고 끊임없이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허위사실을 공 론화해서지위를유지하지못하게했다.또한,공이어 영대장, 한성판윤에 임명되었을 때 좌의정을 비롯한 노론중심의문관들은무관이높은자리를차지하였다 고시기하고모함하면서인신공격을자행하여끝내자 리에서끌어내리는일을서슴지않았다. 무반출신으로 임명된 주요관직을 살펴보면 생애 77년중54년동안무반의길을걸었고국가의안위와 방어에 최선을 다했으며, 영조가 특별히 제수한 최 일선 평안병사(平安兵使)에서 삼도통제사(三道統 制使)에 이르기까지 주요직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이인좌의난이발생하였을때서슴지않고출정하여 관군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난을 토벌하고 공적을 세웠다.그 결과 공신록에 책록 되고,함녕군에 봉군 되었으며,자헌대부에승급되었다. 공이공신이되면서영조의신임과함께승승장구 하니 노론중심의 대신들은 제거 일순위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주요 요직에 발탁되어 임직을 옮길 때 마 다 조정에서는 앞 다투어 끌어내리기 위한 계차(啓 差)를 수없이 한다.오죽했으면 영조가 박찬신 파직 (罷職)에 대해서는 당습(黨習)이라고 책망하였겠 느냐! 이렇듯 실록에 있는 내용을 하나하나 옮기기 조차민망하다. 공의나이77세고령에무슨영화를얻기위해과격 파소론과손을잡고역모를하겠습니까?공신집안으 로적당한부를축적할수있었고,자손들도모두현달 하여승승장구있었으며,또한,영조의각별한관심으 로 주요관직에 제수되어 군신유의(君臣有義)를 지키 기를노력하였는데어떻게역모를할수있겠습니까? 이시기를 전후하여 인조조에 잠야(潛冶) 박지계 (朴知誡)선생은 당파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충남 아 산으로낙향하여산림(山林)으로후학양성에힘섰으 며,영조조에 분무원종1등공신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월천박내정선생은공과9촌간으로끊임없는당쟁에 서도 굳건히 살아남아 기로소에 들었으니 대단한 일 이다.이번글을쓰면서태종때병조판서를지낸박습 (朴習)선생이태종이방원과동방갑계이면서도태종 의 왕권강화와 반대파의 중상모략으로 강상인의 옥 에연루되어참화를입은것과함녕군박찬신선생이 당파에휘말려아무죄없이윤지의옥에연루되어참 화를 당하니안쓰러울 뿐이다.역모죄에휘말리면 친 족(4촌)과 처가에까지 화를 미쳐 집안이 풍비박산(風 飛雹散)되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은 노비로 전락 (轉落)되어 다시 재기는 쉽지 않았으나 순종(純宗) 원년(1907)정미년(丁未年)에 신원되고 관작도 추복 되었다. 실로 153년 만에 이루어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어 후인들의 현창사업이 이루어지길 기대 해 본다. /글박성호기자(함양박씨구소명종중) 무신으로한성판윤에오른함녕군(咸寧 君)박찬신(朴纘新) 선조 유지를찾아븣 생애와가계 븮분무공신녹권븯2등인朴纘新(박찬신,함양朴氏)의朴자가먹(●)으로지워진것은1755년나주괘서사건으로연루되어참화되었기 때문에후대에지워버린듯하다. 함녕군단비 출사와정치적배경(관료생활) 무신란을평정분무공신(奮武功臣)이되다 나주괘서사건에연루되어피화를당하다 맺음말 신원복권증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