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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0월31일 화요일 7 (제202호) 기 획 국담재의 최초의 건립시기는 전해지지 않는다.그러나 197 8년 현 재사를 중건하면서 풍산인 유석우(柳奭佑)선생이 지 은 상량문 첫머리에 뷺훌륭한 분 은거(隱居)하여 너그러우니 사는곳완연히맑은향기어리고,사모하여국그릇과담벼락 에 나타나니 제사지내는 향냄새 오랫동안 사방에 퍼졌었어 라.오랜세월에집의퇴락을면치못하는것이야어쩌랴!부지 런한정성으로자손들의이어짓는다행을힙입었네.뷻라고기 록하고있다. 구전에 의하면 국담 선생께서 밀양 삽포리에서 태어나 왜 란이한창인1593년(癸巳)봄에부모가다역질(疫疾)에걸려 마침내 사망하고 형제자매 등이 뒤를 이어 사망하였으나 난 리통에 몸소일곱 상(喪)을 업어다가 우선깊은 산속에매장 하고 이후 1598년(戊戌)에 전쟁이 약간 안정되자,풍각현(豊 角縣)북쪽가장높은산의서쪽기슭갑좌(甲坐)언덕에반장 (返葬)한 후 성묘를 위해 밀양 삽포에서 풍각으로 이주하여 거주하고 장자를고향으로보냈다고한다.이로보아현 국담 재가소재하고있는곳에본가(本家)가있었고,1672년(현종1 3, 임자)에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고 불천지위(不遷 之位)의 은전이 내려져 사당을 짓고 향화를 받들어 오던 중 재사(齋舍)가협소하고퇴락하여1978년 중건하기에이른것 이라 짐작해 볼만 하겠다.이에 최초 건립 시기는 1672년으로 추정해볼만하겠다. 재사(齋舍)는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부조묘)와 본재 (菊潭齋),대문(敬敦門)으로구성되었다. 본재인 국담재는 전면 5칸 측면3칸의 팔짝지붕 와가이고 왼쪽의 2칸과 오른쪽의 1칸은 방으로 구들을 놓아 선조의 유 훈을 되새기는 수학(修學)의 공간으로 또는 전일 입재한 종 원들의 재숙소로 사용하고 2칸의 대청은 제향공간으로 활용 하고있다. 부조묘는 큰 공훈이 있는 사람으로서 영구히 사당에 위패 를두는것을나라에서허락한신위를말한다.영남밀양은문 화가 훌륭한 고장이다. 훌륭하고 뛰어난 선비가 따라서 배출 되었는데 이를테면 숭정처사(崇禎處士)국담 박수춘 선생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소나무와 대나무와 같은 절개와 지조 를 가졌다. 어릴 때부터 과거공부를 버리고 경서와 사기(史 記)를널리읽었으며효도와우애는천성에뿌리를두어보통 사람의 마음보다 훨씬 멀리 나왔고,정유재란에 의병을 일으 켜 몸을던져 나라를구했다.병자호란에 또의병을일으켰으 나 화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원이 숭정 사람으로 남기 위해 은거하여 후학양성에 매진하였기에, 이조참의 증직을 내려후세에영원토록기리도록한큰어른이다. 1672년 부조묘지전 이후 선생이 서거한 음력11월 5일과 부 인월성김씨의기일1월24일에제향을올린다. 제향은사당에출주고사를올리고위패를국담재정당으로 모신뒤정해진홀기에의해봉행된다. 국담재 주변에는 파조인 행산공의 재사 행산재가 있으며 삽포리앞도로변에는찬성사공이하선조4위의단비와국담 선생의여표비가있다. 여표비(閭表碑)는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 리기 위해 마을입구 등 길가에 표시로 세워두는 비(碑)를 말 한다.이에비문을통해국담선생을소개해본다. [유명 조선국 증통정대부 호조참의 숭정처사 국담 박선생 여표비명(有明朝鮮國贈通政大夫戶曹參議崇禎處士菊潭朴先 生閭表碑銘)] 사람들이흔히말하기를,옛사람과지금사람이서로동도 (同徒)가 될 수 없다고 하는데,나는 국담 박 선생을 볼 때 그 렇지않다. 처음 공이 약관의 나이에 임진란(壬辰亂)을 만나 온 가족 을 이끌고 난리를 피하여 깊은 산골짜기에 머물렀는데,그때 관(棺)을 파는 자들이 병화와 흉년을 이용하여 부당한 욕심 을 채우기에 급급하였다. 공이 나라의 걱정과 아픔을 나눠야 할 시기에 역질(疫疾)을 만나 거의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가 다시 소생하여 흐느껴 울면서 하늘을 향해 자신으로써 대 신해 주기를 원하였으나 마침내 양친(兩親)과 다섯 남매의 변고를당하고,최씨자(崔氏姉,누님)만이겨우면하였다. 공이 야위고 떨리는 몸으로 일곱 상(喪)을 업어다가 임시 로 엄토(掩土, 시체를 흙으로 겨우 가릴 정도로 묻음)하였으 니, 바로 계사(癸巳, 1593년) 3월이었다. 아무리 곤궁한 중에 서도 집상(執喪)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나물밥과 나물국을 반드시 조석(朝夕)으로 올렸으며, 적은 쌀을 마련하여 삭망 전(朔望奠)에 대비하였다.영동(嶺東)으로 표박(漂泊,유랑) 하여서는빈소(殯所)가있는청송(靑松)과의거리가좀멀었 으나애성(哀省)하는일을폐지하지않았으므로고장사람들 이존경하였다. 무술(戊戌, 1598)에 전쟁이 약간 안정되자, 즉시 운구(運 柩)를계획하였다.친지중에서말이나소를내어이를도우려 하였으나 공이 사양하기를,뷺난리 중에 비록 의례(儀禮)대로 반장(返葬)할 수는 없으나 부모의 유체(遺體)를 차마 축생 (畜生)의등에맡길수없다뷻하고,몸소4백여리밖에서부운 (負運,등에업어)하여장사를마쳤는데,시종(始終)성신(誠 信)과 예의(禮意)를다하였다.뒤를이어다섯 상(喪)의 반장 (返葬)도1년내에다마쳤다.이는진(晋)나라오규(吳逵)의 한 집에서 13명이 굶어죽었을 때 1년 만에 7기(基)의 묘(墓) 를 이룩하는 데 생계가 매우 가난하였으나 모든 부의(賻儀) 를 일체 받지 않았던 예와도 똑같이,몸소 반천리(半千里)밖 에서양친(兩親)의 유체(遺體)를 부운(負運)하였으니,옛 사 람과지금사람이서로동도(同徒)가될수있다하겠다. 빌어다가 부모를 봉양할 때 저물게 돌아오다가 여러 차례 맹호(猛虎)를 만났으나 도리어 길을 보호해 주었으므로, 이 를 힘입어 해를 면한 동행자들이 서로 전하여 기이한 일이라 일컬었다. 하루는길에서한어린소녀를만난바,난리중에의지할곳 이 없다고 하소연하므로 공이 가엾이 여기어 거두어다가 친 척처럼 대우하고 자씨(姉氏)와 함께 거처하게 하였는데, 내 외의한계가절연(截然)하였다.마침그녀의부당(父黨)으로 이웃고을의원으로있는이가이소문을듣고그녀를데려갔 으니, 이전을 말하면 허 자(許孜)의 사슴을 죽인 일과 곽 문 (郭文)의 맹수(猛獸)를 구제한 일이 그 경우는 다르나 감응 (感應)은같았고,이후를말하면화자어(華子魚)의샘에빠진 사람을 구출한 일과 안 숙자(顔叔子)의 촛불이 다 닳아 기둥 으로대신한일이겸유(兼有)되고부합되었다. 정유(丁酉)에왜적이다시침입해오자공이이르기를,뷺전 날에는 내가 어버이를 받들기 위한 분찬(奔竄, 바삐 도망쳐 숨음)으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나, 지금에는 나라를 위하여한번죽을수있다뷻하고는,창의(倡義)에앞장서서격 문(檄文)을 돌리고 의병을 모아,방어사(防禦使)망우(忘憂) 곽 재우(郭再祐)가 지키고 있는 창녕 화왕산성으로 곧장 달 려가한지방의적을막았다. 무오(戊午, 1618)에 광해의 마음[靈怡)이 날로 황음(荒淫) 하여,군소(群小여러소인들)들이답습하는한가(漢家)의남 은폐습과남궁(南宮)의낡은지혜를충모(忠謨충성된정책) 로 여기고, 바른말 하는 이를 향양(桁楊,죄인의 목에 씌우는 칼과 발에 채우는 차꼬를 아울러 이르던 말)과 천극(위리안 치)으로 다스리므로 조야(朝野)에서 감히 다시 입을 여는 이 가없었다. 공이뜨거운피에격동된나머지소(疏)를지어극언(極言) 하였는데 춘추(春秋)에, 아들이 어머니를 원수로 여기는 의 (義)가 없다는 것과,천하에는 옳지 않은 부모가 없다는 말들 을들어증거하여조금도꺼리는바가없었고,소를올리게되 어서는광해가소를받아드리지말라는하교(下敎)를특별히 내리므로 공이 소를 품고 방황하다가 시를 지어 개탄하기를, 뷺서궁(西宮)에문닫혀윤리무너지고,북궐(北闕)에구름깊 어해와달어둡네뷻라하였다. 병자란(丙子亂)이일어난뒤에공이격문(檄文)을돌려의 병을 일으켰다가 화의(和議)가 이미 이루어졌음을 듣고는, 븯산에 들어가 숭정 처사 되기 소원이오, 세상에 나가 병자년 백성되기부끄럽다뷻는등의시구를지어벽(壁)에쓴뒤에자 취를 감추고 일생을 마쳤으므로 세상에서 븮숭정처사븯라 일컬 었으니,아!장수양의강회(江淮)를방어한공로와주문공(朱 文公)의 갑인 봉사(甲寅封事)의 요지(要旨)와 노 중련(魯仲 連)의동해(東海)에빠져죽겠다는기풍을다시볼수있다. 남의 급한 일을 돕는 데는 범주(范舟)나 노균을 따지지 않 으므로 목민관(牧民官)이 아니면서도 그 혜택이 왕화(王化) 를 대표하여 수 천 명을 살렸으며, 주자(朱子)의 학규(學規) 와 여씨(呂氏)의 향약(鄕約)을 가져 선도(善導)하였으므로 이주(移住)한벽지(僻地)가본시무식한풍습이었으나,양성 (陽城)이 지방에 있을 때 그 덕에 감화된 자가 많았고, 진식 (陣寔)이 향리(鄕里)에 있을 때 송사(訟事)를 질정(質正)한 자가많았으니,이는다옛사람과더불어동도(同徒)가될만 하다. 그시종(始終)을따져보면모두학문과수양중에서나 온것이었다. 증조는곤양제독(昆陽提督)으로 휘언계(彦桂)인데,문행 (文行)으로세상에알려졌다. 조부는통덕랑(通德郞)으로휘 대성(大成)인데숨은덕이있었고회재(晦齋)이언적선생을 종유(從遊)하였으며, 송계(松溪) 신 계성(申季誠)·상사(上 舍) 박 열(朴悅)과 더불어 삼걸(三傑)로 일컬어졌다. 고(考) 는 동몽교관(童蒙敎官) 증군자감정(贈軍資監正)으로 휘 신 (愼)인데, 퇴계의 문하로 그 영명(英名)이 열 차례의 추천서 (推薦書)에올랐고,배우는이들이날로모여들었다. 공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습관이 본성(本性)과 더불어 융 화되었다. 소학을 배울 때 이르기를, 뷺사람 되는 길은 이에서 더할 수 없다뷻하므로 감정공(監正公,아버지)이 기이하게 여 기면서,뷺옛날점필재가한훤당(寒暄堂)의븮소학의글에서어 제의잘못을깨달았다뷻는구절을보고뷺성학(聖學)의기반이 확립되었다븯고하였는데,바로이아이가아닐는지뷻하였다. 일찍부터 사장(詞章)에 능하여, 승지(承旨) 황여일(黃汝 一)의흠모(欽慕)를받아친교(親交)가되었고,여러차례고 등(高等)향공(鄕貢)에뽑혔으나자신에게타당하지않다하 고개연(慨然)히구도(求道)에유의하다가,한강(寒岡,정구) 이 노선생(老先生)에게 친자(親炙)하였음을 알고 한강을 찾 아서 학문의 요체와 태극(太極)의 이치를 물었으며, 또 여헌 (旅軒, 장현광)을 따라 이기설(理氣設)을 강론 하였으므로, 두 선생이 다 추앙하고 허여(許與)하였다. 그 가학(家學)이 사도(師道)에 대해 연원(淵源)의 바름과 기대(期待)의 무거 움은이를본뒤에야알수있다. 그러므로그학문이모든글 을 다 읽고 모든 이치를 다 갖추어 천인 성명(天人性命)의 미 문(微妙)과도덕 인의(仁義)의 실제에 그원유(源流)를모두 탐구하였는데,그관건(關鍵)은경의(敬義)를함께가지고존 양(存養)을아울러이룬데있었다. 먼저 범도로써 몸을 단속하여,사람을 지도하고 일을 대처 하는 데 일체 치우치지 않았고,가장 교술(敎術)에 능하여 힘 껏 순서를 따라 성취하고 수립(樹立)하게 하므로 소자 후생 (小子後生)은자신을그제시(가르쳐인도함)에위임하고,현 호장자(賢豪長者)는허리를굽혀강마(講磨)하였다. 경제(經濟)에 대한 생각은 항상 시사(時事)의 이해(利害) 와민생(民生)의휴척(休戚)에두었고,더욱사풍(士風)을진 작(振作)하고 향헌(鄕憲)을 붙잡는 일에 독실하여 선(善)을 장려하고 잘못을 경계하는데 기뻐하고 걱정한 표정이 문득 얼굴에나타났으며,평소에는시동(尸童)과같았으나사람을 접할 적에는 봄바람처럼 애연하였다. 하지만 그 입덕(立德) 의숭고(崇高)함은저절로범할수없었다. 일찍이정인홍(鄭仁弘)이지은신송계(申松溪)의여표비 문(閭表碑文)중에회재·퇴계두선사(先師)를함부로헐뜯은 말을면박하였다. 그비문을내던지고그비석을묻어버리자는것이사림(士 林)의 공통된 분개(憤慨)였으나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어찌 하지 못한 일이었는데,그의 하늘에 닿을 위력으로도 묵묵히 입을 다물 뿐,행흉(行兇)하거나,노여워하지 못하였으니,이 어찌위무(威武)로도능히굴복시키지못함이아니겠는가. 공은 백행의 근본(百行之本, 효를 말함)이 어릴 적부터 이 미 극진하였다. 매일 첫닭이 울면 일어나 의관(衣冠)을 바루 고 있다가 여명(黎明)에 사당을 참배하였으며, 조상을 받드 는 데 일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따라, 아무리 노 쇠(老衰)하여 힘이 미치지 못하여도 제기(祭器)를 진설하고 제물을준비하는데직접살폈고,항상부모형제를끝내받들 지못한것을일생의유감으로여기어,마치풍수(風樹)·공회 (孔懷)의비통(悲痛)과같았다. 오직최씨자(崔氏姉)가난리중에부군을잃었으므로마치 엄군(嚴君)처럼받들고온가정(家政)을맡긴지60여년이되 었으며, 자씨(姉氏)가 작고한 뒤에 매우 슬피 곡(哭)하였고 장사(葬事)가끝나기전에는평소에들던반찬을물리쳤으므 로, 자손과 종족(宗族)들이 그 대질(나이 80세를 말함)를 염 려하여방문하러오는사람을사절하였다. 종형 양춘(陽春)과 더불어 집을 연결하여 살면서 연로(年 老)하도록 이불을 함께하여,돈목(敦睦)의 풍도가 온 가정에 충만하였으니, 그 덕업 풍치(德業風致)와 청조 고행(淸操高 行)이 아속(雅俗)을 진작(振作)하고 인심(人心)을 감복(感 服)시킬 만하였다. 그러므로 향인(鄕人)이 시귀(蓍龜)처럼 믿었고사류(士類)가산두(山斗)처럼우러러보았으며,진신 대부(縉紳大夫)도 그 지방에 들어선 이는 다 그집을 찾아 경 례한때문에그때「산림재상(山林宰相)」이라일컬었다. 임진란(壬辰亂) 이후 1주갑(週甲)이 되는 임진(壬辰, 165 2)11월에고종(考終)하였으니,출생한융경(隆慶)임신11월 11일부터 계산하면, 향년(享年)이 81세였다. 조상[吊]하는 이가길목을메워마치사친(私親)을곡(哭)하듯하였고심지 어 심상(心喪)하는 이가 있었으며,야로(野老)와 산승(山僧) 까지도 다 인인(仁人)이 갔으니 이제 의지할 곳이 없다는 눈 물을흘렸다. 밀양부(密陽府)북쪽봉천사(鳳泉寺)동쪽기슭축좌미향 (丑坐未向)에 안장되었고 회장(會葬)한 수효가 4·5군(郡)에 이르렀다. 공의 휘는 수춘(壽春), 자는 경로(景老)이며, 밀성군(密城 君) 언부(彦孚)가 시조이고 비 밀양 손씨(密陽孫氏)는 참봉 (參奉) 취(鷲)의 따님으로 규범(閨範)이 있었다. 공은 교관 (敎官)월성(月城)김우용(金遇鎔)의따님을맞이하여3남을 두었다븣. 저서(著書)로는 독서지남(讀書指南)·학문유해(學問類 解)·도통원류록(道通源流錄)·동방학문연원록(東方學問淵 源錄)·의례문견해(疑禮聞見解)등과 시·문(詩文) 몇 권이 집 에간직되어있다. 일찍이 이르기를, 뷺배우는 이는 뜻을 하루도 게을리할 수 없고, 마음을 하루도 놓을 수 없다뷻하였고 또 이르기를, 뷺이 (利)를상(上)으로여기면의(義)가하(下)에서게되므로부 자(夫子)의, 븮원망이 많다븯는 교훈으로써 자제들에게 당부하 였고,경(敬)에서벗어나면오(傲)에들게되므로단서(丹書) 의 븮게으르면 멸망한다.븯는 설(說)로써 후생(後生)들에게 권 면(勸勉)했다뷻하였으니,이것이평소에늘하던말이었다. 현종(顯宗) 임자(壬子)에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 었으니, 그 은졸(隱卒 임금이 죽은 이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 는 것)·숭종(崇終임금이 죽은 이에게 융숭한 대우를 내리는 것)이 거의 숨은 덕에 보답되었으나 일대(一代)의 사적이 환 히드러나지못하였고,제사를받드는일은그역량이방대하 여갑술에비로소풍각형남쪽산마을에사당을건립하고븮남 강(南岡)븯이라 편액(扁額)하였으니,공이 성묘(省墓)의 편리 함을위하고또임학(林壑)의그윽함을취하여이주(移住)소 요(逍遙)하던곳이다.(이하생략) 뱚재/실/탐/방 국담재 경남밀양시부북면후사포리 국담재전경 국담재는 증 이조참의 숭정처사 국담 박수춘 선생(1572-1652)의재사이다.불천지위(不遷之 位)의 제향을 받들고 종중사를 의논하는 곳이 기도하다. 선생의 일생(一生)은 의(義)를 친행(親行)하신 생애(生涯)였다.1597년 정유재란에 선생은 격 문을돌려의병을일으켜곽망우당과함께창 녕화왕산성을고수하였고,47세가되던해광 해가대비를유폐(流廢)하자선생은광해의불 륜과비리를간(諫)하고간신배들에대한단죄 (斷罪)의 소를 올렸다.50세가 되던 해(1621)회 재·퇴계선생을비방한‘신송계여표비’발문에 대해 선생은 제작자 정인홍을 결탄(結歎)하고 이글을직접그에게돌려주는등일신일가(一 身一家)의 위험을 무릎 쓰고 오직 의(義)를 친 행(親行)하신 뚜렸한 행적을 남겨 현종(顯宗) 임자(壬子)에호조참의(戶曹參議)에추증되고 부조묘지전의은전(恩典)이내려졌다. 연원및규묘 국담재전당 국담선생부조묘제향 부조묘(사당) 기제사를모시기위해사당에서출주고사후마련된제상에신위를봉안하 고있다. 국담재주변유적 여포비각전경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밀양문화원이 개최하는 2023년 향현추모학술대회는 병자호란에 의병 활동을주도하였고,성리학발전에업적이 큰‘국담 박수춘선생의생애와 사상’을조명하는학술대회를개최합니다. ※일시:2023.11월17일금13:00시 ※장소:밀양문화원대강당 2023년밀양문화원학술대회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