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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0월31일 화요일 5 (제202호) 관향조 종친회 신라만고충신 관설당공 의 후예가 한자리에 모여 선조의 충절을 계승 발전 시키고 후손 간 친목 도모 와 위선 사업에 매진키로 다짐하며 ‘신라박씨관설당 공파대종회’ 창립식을 가 졌다. 이날 창립총회는 지난 5 일 오전 10시 30분 관설공 이배향된유방사에참배하고11시전남진도군진 도읍교동회관2층회의실에서그동안산파역할을 하였던본보상섭국장의진행으로정관개정,임원 선출,향후 추진계획 등을 논의 한 가운데 정관 안 을일부자구수정하여만장일치로가결하고임원 선임에 있어 신임 회장에 영해 박성수 회장, 감사 경주 박성열, 강릉 박용백 현종이 추대되었고, 부 회장은 각 문중에서 1명,이사 영해 4명,강릉 3명, 경주3명등10명으로하여소문중회의를거쳐추 천키로하고노성,면천,우봉등이날참여하지않 은문중에도배정한다. 그리고안정적인종회운영을위해이날참석한 종원 모두가 창립기금을 십시일반 협찬하고 회장 은 연 100만원,각 문중 분담금으로 종원수에 비례 하여영해100만원,강릉30만원,경주30만원을분 담키로함에따라이날상당액의기금이출연되어 향후전망을밝게했다. 박성수 초대 회장은 수락인사를 통해 뷺멀리 강 릉,봉화,영주,함안,서울등많은종원이땅끝까 지 오신 것은 관설당 할아버지의 숭고하신 뜻을 기리기 위해 참석한 것으로 후손 모두에게 감사 를 드린다고 말하고 많이 부족하지만 제가 더 낮 은 자세로 종현님들의 뜻을 모아 더 단합하여 건 강하고 유익한 모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 라고 각오를 밝히고 부족한 저에게 막중한 회장 을 맡겨주심에 실망시키지 않겠끔 최선을 다하겠 다뷻고말했다. 박성수 초대회장은 2008년부터 영해박씨 대종 회장으로 봉직하며 대동보를 출간하는 등 종중의 위상을 크게 끌어올렸으며, 오릉보존회 수석부총 재로차기총재물망에떠오르고있다. 선진그룹 회장으로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 하고있어본보창간13주년을맞아대한민국박씨 지도자대상숭조부문을수상한바있다. 관설당공의후예는영해·강릉·경주·면천·우봉· 노성·이산·구진 박씨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루고 있다.그러나같은후손으로서로를모르고있다는 것이부끄럽다며영해박씨박성수회장의예길듣 고2021년초부터이를각문중에알리어2021년12 월 4일 선진정공 천안공장 영빈관에서 처음 상견 례를갖고2022년4월4일강릉경양사관설당공의 다례행사에20여명이참석정을나누었다. 이후 2022년 4월 29일 박성수 회장이 당진 면천 문중면천대를방문모임의당위성과필요성을강 조하고많은참여를당부하였으며,2022년11월16 일 공주 동계사 제향에서 3차 모임(25여명)에서 2 023년대마도순국비추모제에후손들을초청하여 함께제례를봉행하자고제의하면서지난7월4일 대마도순국비 추모제향에 19명이 참석 선조에 대 한추원보본의정성을다하고오늘창립총회일정 을정하여창립에이른것이다. 이날 창립에는 영해, 강릉, 경주 문중에서 참여 하고 노성,면천,우봉 문중에서 뜻을 같이하고 있 어조만간더많은문중이참여할것으로보인다. 한편회의전각종중대표인사에서영해문중의 박성수 회장은 정말 이산가족을 만난 듯 기쁘고, 이기쁨을계속해서누렸으면좋겠다. 박기학 경주문중 회장은 어렵게 만났으니 영원 히함께하였으면 좋겠다.박용준 강릉문중의 고문 은관설당할아버지의충절을널리알리고또계승 발전시켜나가길바란다는인사와박주언경주문 중 진도 문임은 멀리 섬지역 진도를 찾아준 일가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관설당공의 후예들 의진도입향과정을설명하고짧은만남이지만여 유있고넉넉한모임이되길바란다며환영사에갈 음했다. 장소를 옮겨 오찬에서는 박성수 회장이 내년 8 월경이자리에모인종원여러분을중국의장백산 에초대할것이라고밝혀뜨거운박수가이어졌으 며시종일관화기애애한가운데창립을마쳤다. 이날선임된임원은다음과같다. △회장 박성수(영해) △부회장 박봉영(영해), 박종온(경주), 박용준(강릉) △이사 박흥열, 박하 웅,박광열,박순길(이상영해),박주언,박기학(이 상 경주),박치규,박재동(이상 강릉)△감사 박성 열(경주), 박용백(강릉) △재무 박우형(영해) △ 간사박상섭(본보편집국장)-이상- 관설당공은 신라 제5대 파사왕의 5세손인 물품 (物品)의아들이다. 휘 제상(堤上),또 다른 이름은 모말(毛末)이라 한다.362년삽량주수두리(현경상남도양산군소 토면 효충동)에서 태어나 치산하(현 경상북도 울 주군두동면만화리)에서성장하였다. 어사대부 간관(御使大夫 諫官)과 이찬을 지냈 고,417년(눌지왕)삽량주간(삽良州干)으로있던 공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에게 볼모로 잡혀 있 던눌지왕의첫째동생복호(卜好)를탈출시켜귀 국했으며, 집에도 들르지 않고 다시 일본에 망명 으로 가장하여 볼모로 잡혀 있던 눌지왕의 둘째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탈출시켜 귀국하게 하였 다. 이후자신은체포되어발가죽을벗기고갈대위 를 걷고,쇠를 달구어 그 위에 세우는 등의 고문을 당하며 일본 신하가 될 것을 강요당하였으나 뷺계 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뷻며 거절하고 박다진-목도(博多津-木島) 에서소살(燒殺)되었다. 박제상이 부인 김씨에게는 알리지 않고 일본으 로 떠난 뒤 그 사실을 알고 쫓아갔으나, 만나지 못 하자 망덕사(望德寺) 남쪽 모래 위에서 몸부림치 며 통곡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 모래를 장사 (長沙)라하였으며,친척두사람이부인을부축하 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 일 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곳을 벌지지 (伐知旨-뻗치다의고유음)라하였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이기지못하여두딸과치술령(-수릿재.울 산,경주경계에있음)에올라가남편을부르며통 곡을 하다가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다. 첫째 아기 (阿奇),셋째 아경(阿慶)또한 아버지를 부르며 통 곡을 하다 죽으니, 세 모녀를 븮호국삼신녀(護國三 神女)븯라칭하였다. 이소식을전해들은눌지왕은크게슬퍼하며제 상에게 대아찬의 벼슬을 내리고 부인을 국대부인 (國大夫人)에 봉(封)하였으며, 치술령에 은을암 (隱乙庵)을세우고치제(致祭)하였다. 또한제상의둘째딸을미사흔의아내로맞게하 여은혜를갚도록하였다. ‘관설당공파대종회’창립 뱚뱚관설당공의충과절의정신계승과발전그리고후손간친목도모에목적 뱚뱚초대회장영해문중박성수회장추대 유방사참례광경 박성수회장이수락인사를하고있다. 박성수회장 신라 만고충신 박제상 공(公)의 충절을 기리 기위한제향이지난24일(음9.10)오전11시경남 양산시 상북면 박제상효충공원 내 효충사(孝忠 祀)에서 지역 유림과 후손 등 100여명이 참례한 가운데있었다. 양산지역유림으로구성한춘추계(春秋契)주 관,양산시,양산향교,양산유도회후원으로봉행 된 이날 제례는 정건영(鄭健泳) 집례관의 창홀 에 따라 이정곤 양산시 부시장,이종희 양산시의 회 의장, 박노인 영해박씨대종회 부회장 순으로 헌작하고이춘택(李春澤)축관의 독축으로 30여 분에걸쳐엄숙봉행되었다. 효충사의 제례는 효충사의 전신인 충렬사가 양산 교동에 새롭게 건립되어 삼조의열(신라의 박제상, 고려의 김원현, 조선의 조영규)이 옮겨 감에 따라 중단되었다가 충렬사의 옛터에 효충 사를 세워 박제상과 그의 아들 문량의 위패와 초 상화를봉안하였으나향화(香火)를받들지못하 다 지난 2016년 향산지역 유림으로 구성된 춘추 계에 의해 제례가 복원되어 매년 음력 9월 10일 제향을받들고있다. 효충사는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갔던 눌지왕의두아우,복호와미사흔을구한후왜국 에서 어떠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끝까지 절개 를 지켜 순국한 충열공(관설당) 박제상 선생과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그의 아들 백결선생 문량 (文良) 公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 터에 세운 사당 으로 경남 양산시 상북면 박제상길 11-1 소재하 고 있으며, 경상남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 다. 박제상 효충공원은 경남 양산시가 다양한 정 신문화 선양사업의 추진을 통해 지역 정통성을 확립하고 역사문화도시로서의 이미지를 높이고 자 지난 2014년부터 추진하여 징심헌을 복원하 고 2016년 박제상 동상을 건립하는 등 다양한 사 업을 통해 충절의 고장이자 효 문화의 본고장임 을알리고 있다. 한편효충공원에서는지난9월9일오후5시30 분부터 지역문화 네트워크 활성화와 공정여행 실현을 위한 문화 플랫폼 븮양산 Culectour(컬렛 투어)븯에서 븮해설이 있는 문화예술제 각양각색 (各樣各色)븯을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박제상 공에게 문화예술제를 고 하고 효충사 건립에 사재를 털어 지역문화 정체 성을 정립하고자 했던 븮석헌 안종석 선생 지역문 화사랑븯강연과 함께 효충공원 탐방을 시작한다. 이어 북춤, 국악 연주, 판소리, 국악기로 듣는 팝 송,함께부르는아리랑메들리등이펼쳐진다. 또한, 접빈다례 시연과 시 낭송·해설, 재기발 랄한 초등학생 노래와 기타연주 등이 마련되어 시민과 함께하며 선생의 충절을 널리 알리는 계 기가되었다. 양산효충사‘관설당박제상선생’추모 제향봉행 지역유림주관븣박제상효충공원,븮해설이있는문화예술제각양각색(各樣各色 )븯성료 신라만고충신박제상선생을추모하기위한유림과시민들의행렬이이어진가운데지난24일경남양산시상북면소재효충 사에서추모제향이봉행되었다.사진제례에참례한후손들이함께하고있다. 2016년세워진박제상선생동상 1833년(순조33)장성군 내 유림들의 발의로 돈재 박연생,교리김개선생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수산 사 제향이 지난 19일(음9 .5)지역 유림주관으로 봉 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사당이 있 는전남장성군황룡면신 촌마을에 유현(儒賢)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지역 유림인의 발길이 이어진 가운데 김한종장성군수가함께하지못함을아쉬워하며 유림인들을독려하였으며,오전9시제물봉진례 와 사축에 이어 강봉구(姜奉求) 집례관의 창홀 에 따라 초헌관을 위시하여 제관들이 신문 밖에 서 도열하고 이어 학생들이 뒤따르면서 시작되 었다. 특히 장성군의회 고재진 의장,심민섭 부의장, 최미화의원이차례로헌작하면서지역의회에서 훌륭한 선현의 가르침을 받아 지방의회의 꽃을 피워보겠다는다짐속에봉행되어장성군의회에 대한 지역민들의 찬사가 이어졌으며, 김동석(金 東錫) 유학자의 독축은 유향(儒鄕)의 기풍(氣 風)이 널리 퍼지는 듯 하였다. 제향후에는강당(숭의당)에서분포례와강평 이 이어진 가운데 초헌관으로 헌작한 고재진 의 장은 훌륭한 선현의 제향에 헌작하게 되어 무한 한 영광과 기쁨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지역의 유학발전을 위해 장성군의회도 함께 할 것이라 며지도편달을당부했다. 심정섭(沈貞燮)도유사는어려운여건속에서 도 훌륭한 제관을 모시게 되어 다행이라며 지역 유림들의 성원에 수산사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며 지속적인 성원을 당부했으며, 수산사 보존회 박길섭(朴吉燮) 이사장은 모든 분들의 성원에감사드리며특히장성군의회의감사함을 전했다. 이어 변온 장의의 후임으로 이충원 장성향교 사무국장을 선임한 가운데 이 신임 장의는 많은 것이 부족함에도 장의라는 무거운 중책을 맡겨 주어 개인적으로는 영광이다며 최선을 다해 노 력하겠다고말했다. 이충원 신임 장의는 지역유림의 중추적인 인 물이다. 장성향교와 춘추회 등 지역 유림단체의 살림을도맡아맡고있어신망이두텁다. 수산사는 1833년(순조33) 장성군내 유림들의 발의로돈재박연생,교리김개선생을모시기위 해장산(長山)이수산(里水山)에세웠으며,당시 노사기정진선생이상량문을지었다. 35년만인1868년대원군의서원훼철령에의해 수산사 역시 훼철되어,1977년 위치를 장산 이수 산에서 신호리 신촌의 밀성박씨 도평의사공 후 돈재공종중의제당(祭堂)뒤로옮겨사우(祠宇) 를 복설(復設)하고 청백리인 아곡 박수량, 천문 지리에밝은백우당박상의,지역의학자눌헌박 상지 선생을 추배(追配)하여 향사를 모셨다. 복 설하면서 기존(旣存) 강당은 숭의당(崇義堂)이 라 명명하고 전면에 경앙문(景仰門)을 세워 外 三門을 삼았으며, 강당 동편에 지경재(持敬齋) 라 이름한 동재격인 집과 변소를 지었으며,수산 사(水山祀)라 이름한 사당(祠堂)과 강당 사이에 는신문(神門)을세웠다. 주벽으로 배향된 돈재 박연생(豚齋 朴衍生) 선생은 지혜와 용력이 보통사람보다 많아 늠름 한 자세와 높은 지조를 타인이 우러러 볼만한 큰 어른이다.단종때절충장군행시위사대호군(折 衝將軍 行 侍衛司 大護軍)으로 서울에서 기거하 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영의정이 되어 위엄과 덕망이 날로 높아지자 하늘의 명령과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돌아갔음을 아는 모사군 신숙주,한 명회,권람,정인지등이수양대군의처소에출입 하면서임금의자리에오르기를논의하였다. 이에선생께서는수양대군과절친한처지이지 만 수양의 부름을 마다하고 호남으로 돌아가기 를결심한뒤천첩(賤妾)등에게말씀하기를“너 희들은 종의 자식이기 때문에 나를 따라 함께 갈 수 없으니 다음날 나를 찾는 관원(官員)들에게 너희들이 꾸지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이 편지 를 내어 보여주면 겨우 모면할 것이니 잘 간직하 여 잃어버리지 말라”하시고 호남 땅으로 내려가 셨다. 첩(妾)은 선생의 말씀대로 의복 속에 간직해 두었는데 세조(世祖)가 과연 첩을 불러 선생의 종적을 물으면서 형벌하려고 할 때 편지를 내어 바치니 세조(世祖)가 다 읽어 본 후 다시는 선생 의종적을묻지않았다.이는편지내용에첩과는 아주 이별하였고 영화를 생각하지 않는다 했기 때문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돌아간 후 세조는 어명을 내려 여러 차례 찾았으나 선생 은병든몸이다하시고나가지않으니2등공신의 녹훈을 내리고 또다시 동궁 때에 은혜가 있다하 여 좌익원종권(左翼原從券)을 주었으나 끝까지 담양 월산면의 사위 이석손의 집에 숨어 나오지 않고 돌아가시니 그곳에 장사를 모셨다.두 임금 을 섬기지 않 는다는 선생의 높은 충절은 생육신 (生六臣)과같다할것이다. 또한 본관을 밀성에서 태인(泰仁)으로 삼았 다.밀성이란본관을쓰지않는것은출세의뜻을 감추며 자신이 슬퍼함이요. 백세후에도 영원히 숨기려는뜻이었다. 또 한분의 교리 김개(敎理 金漑) 선생의 본관 은영광(靈光)으로8세에아버지가돌아가시자3 년동안 질대를 풀지 않았고 문밖을 나서지 않은 지극한효자이다. 1477년 성균진사가 되었고, 다시 문과에 1501 년 문과에 올라 승문원 부정자에 선임이 되었으 며세자시강원에들어서설서(說書)가되었으나 멀리떨어져계신어머니를잊을수가없었다. 즉시 고향 황룡면으로 돌아와 자연을 즐기며 유유자적하였다. 연산군때에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에 발령 받았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그 뒤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이 되었는데 노모가 생존한다는 뜻으로 상소하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옥과 현감으로나왔다. 연산군의 학정(虐政)이 날로 더욱 심해지자 중종반정에 뜻을 함께하여 중종이 즉위하자 교 리(敎理)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다시 고 향으로돌아왔다. 처음 수산사에서 돈재 선생과 함께 교리 선생 을 배향한 것은 절의정신이 돈재선생과 같고 그 의염치(廉恥)를높이산것으로보인다. 전남장성육현(六賢)유덕기리는추향 제이어져 지역유림주관븣장성군의회고재진의장,심민섭부의장,최미화의원헌작 이충원신임장의가인사 말을하고있다. 사준이 준소 (준所)에서 술을 따르는 모습이 장성지역 유풍 을짐작케한다. 관설당공파대종회창립총회에앞서참석한종원들이유방사를참배하고기념촬영을하고있다.유방사는1938년일본의유방원을모태로하 여건립한곳으로관설당공을봉안하는현존하는사당중에제일유서가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