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age

2023년10월31일 화요일 12 (제202호) 기획 모암(茅菴)박희삼(朴希參)선생은함안의대표적사족중의하나인경주박씨문중의현조(顯祖)로,일찍이남명(南冥 )선생과가까이지내면서 그 두 아들을문하에보내어학문을익히게하였으며,명종조(明宗朝)에는유일로천거되어참봉을지내기도하였다.누차 예조(禮曹)의시험에실패한후 경사(經史)를섭렵하고정주학(程朱學)을바탕삼아위기지학에전념하였다.모암생존시에지인들이차운한시나세 상을떠났을때애도한만시를 보면그순후한성품과학문적성취를짐작하기에충분하다.총영한자질로85세에이르도록평생학문을가까이한 모암의일생을유추해 볼 때 많은 글들을남겼을것은분명하자만,현재남아있는글은단몇편에지나지않는다.이는임란(壬亂)과호란(胡亂)등을거 치면서수습을제대로하지못 한결과로추측된다.이처럼남아있는시문(詩文)이드물기때문에공(公)의일생을자세히고찰하는것은불가능하다 .하지만작은조각들이라도모 아선현(先賢)의삶과위적(偉績)을재구성해서,후손은물론이고지역과학계에알려널리본받을수있게하는것이후 인의책무라고생각된다. 1)生涯 본관은경주(慶州)이며,자는노경(魯卿),호는모 암(茅菴)이다.함안평광리(平廣里)[현함안군군북 면 명관리]에서 1486년(성종 17)5월 17일에 태어났 다.아버지는성균진사박유(朴 찮 )이고,어머니는본 군(本郡)출신으로문과에급제하여저작을지낸조 욱(趙昱)의딸함안조씨(咸安趙氏)이다. 모암은 어려서부터 총명 영리하여 4,5세 때 책을 읽고 뜻을 이해하였으며, 8세 때 븮소학븯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어렵지 않게 실천하였다. 장성함에 이르 러효제(孝悌)를근본으로삼고,여사(餘事)로부모 의뜻을받들어과거공 부를하였다.향시에일 곱번동당향시에두번 합격했으나, 예조(禮 曹)에서실시하는소과 (小科)에 실패하고는 위기지학(爲己之學) 에전념하였다.이후경 사(經史)를 두루 섭렵 하고, 정자(程子)와 주 자(朱子)의 학문을 종 주로삼았다. 62세 되던 1547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 어 덕릉(德陵) 참봉에 제수되었으며,그 다음해 다시건원릉(健元陵)참봉 으로 옮겨 재직하던 중 1550년에 어버이 봉양을 이유 로 사직소를 올리고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 왔다. 당시 모암의 지극한 효심이 븮걸체침랑소(乞遞 寢郞疏)븯에 잘 나타나 있다. 부모상에 전후 6년간 죽을 먹으면서 시묘(侍墓)를 하였는데, 상복을 벗지 않았 으며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기일(忌日)에도 마치평생상기를지내는듯이애통해하였으며,제사 를지내는절차는한결같이븮주자가례븯를따랐다. 모암은 성품이 성실 순후하여 매사에 행동거지가 일정하였으며, 혼자 있다고 하여 태만하지도 않았 다. 스스로 모암(茅菴)이라 호를 짓고 살았는데, 고 을에서자못장자(長者)의풍도가있어사람들이모 두믿고따랐다.븮함주지븯븮총담편(叢談篇)븯에다음과 같은기록이있다. 『같은마을에악한소년이있어,공(公)의사내종과 서로 다투다 종을 구타하여 죽였다. 이웃이 그 형옥 (刑獄)을그치게하기위해악소년의집소두마리를 바치자.공이잠시맡아두고서말하기를‘스스로와서 죄를인정하면그를놓아주겠다.’고하였다.공은평소 사람들에게신임을받았기때문에,그가족들이그를 잡아와공에게놓아줄것을간청했다.공이‘네가고의 로사람을죽이려했다면용서할수없지만,서로싸우 다 죽었으니 어찌 너를 벌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서 는, 두 마리 소를 끌고 오게 해서 한 마리는 종의 늙은 아비에게주고,나머지한마리는그이웃에되돌려주 게하였다.이에마을사람들이모두탄복하였다.』 위의일화를통해,엄격하면서도사리(事理)에따 라서는이웃에한없이너그러웠던모암의처신을확 인할수있다. 모암은그당시여러명류(名流)들과사귀었으나, 그 중에서도 남명선생과 가장 가까이 지냈다. 직접 지리산 밑으로 남명을 찾아가서 그 학문과 덕행을 확인한후,1555년(명종10)2월에두아들박제현(朴 齊賢)과박제인(朴齊仁)을산천재로보내어학문을 익히게 하였다.당시에 이루어진 모암 3부자와 남명 선생의 관계는 그 후 함안 지역에 남명의 학문이 뿌 리를깊게내리게한큰동기가되었다고할수있다. 1570년 11월 14일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소는 군북면 평관리이다. 사림(士林)의 공의(公 議)로 1825년(순조 25)에 평천서원(坪泉書院)에 두 아들과 함께 제향하면서, 자손들이 별묘에 따로 봉 안하였다. 첫 부인은 도승지 이평(李 )의 맏아들 로 부제학을 지낸 쌍매당(雙梅堂) 이윤(李胤)의 따 님인 철성이씨(鐵城李氏)이고, 후취 부인은 통정 (通亭)강회백(姜淮伯)의증손자인부사직(副司直) 강신범(姜信範)의따님이다.평생학문에전념한선 생의 많은 글은 임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산실되어 손자인송계(松溪)박이(朴 촬 ,1541~1585)의 문집과 합본으로 되어 있다. 븮모암송계합고(茅菴松溪合稿) 븯는모암의12세손이남(夷南)박규환(朴圭煥,1840~ 1923)이유문을수집하고정리하여간행전해진다. 2)家系 모암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그 시조(始祖)는 신라 개국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이며, 9세인 관설 당(關雪堂)박제상(朴堤上)을중시조(中始祖)로삼 고 있다. 경주박씨 함안파의 파조는 박제상의 32세 손 추호(秋湖) 박앙(朴 왑)으로, 모암의 고조(高祖) 이다. 단종조(端宗朝)에 승문원 저작(承文院著作) 을 지낸 박앙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후 벼슬을 버 리고함안군군북면평광리백이산(伯夷山)밑에은 거한 후, 후손들이 그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있다.박앙은1447년(세종29)에생원시에합격 한 후, 1451년(문종 1)에 문과에 급제하여 저작(著 作)으로 있던 중 1455년에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禪 位)를 하자,곧바로 벼슬을 그만두고 동봉(東峯)김 시습(金時習) 찬성(贊成) 류자미(柳自湄)와 함께 수양산에들어가은거하였다.만년에함안으로내려 와 은거한 후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그 당시 심회(心懷)를 풀어낸 시가 유고(遺 稿)에다음과같이전한다. 『東老何年共首陽(동로하년공수양)동로와 어느 해 수양산에서 함께 지냈나/ 危忠苦節凜秋霜(위충 고절름추상)높은 충성 굳은 절개 추상처럼 늠름했 네/ 夷薇采采今誰與(이미채채금수여) 백이산 고사 리지금함께캘사람없어/叩馬溪亭我獨傷(고마계 정아독상)고마계정자에서나만홀로슬퍼하노라』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함안군수로 재직 중에 븮함주지(咸州誌)븯를 편찬하면서 그 절의를 우러러 인물편에 기록하였다. 증조는 청백리공(淸白吏公) 으로 일컬어지는 박명기(朴命基)인데, 자(字)는 대 로(大老)이다.천거로내승(內乘)을지내고,신천군 수(信川郡守)로재임중우수한치적을세워왕으로 부터새보(璽寶)를찍은유서(諭書)와관복감의비 단 두 필을 하사 받고 청백리라는 칭찬을 들었다.이 어서 합천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병 으로 생을 마쳤다. 븮함주지븯 븮우거편(寓居篇)븯과 븮총 묘편(塚墓篇)븯에부친박앙과함께나란히등재되어 있다.조부박정화(朴精華)는덕을숨기고은거하였 다.만년에조정에서선무랑(宣務郞)에제수하여불 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부친은 성균진사 박유(朴 찮 )로, 자(字)는 정수(庭秀)이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태학(太學)에서 학업을 익 히는동안여러선비들로부터추중을받았다고전한 다.문학에 뛰어나 훌륭한 시문을 남겼으나 산일(散 佚)되어후대에전해지지않는다. 모암은자녀로 3남3여를 두었다.강씨(姜氏)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송암(松 散)박제현(朴齊賢)과 황 암(篁 散) 박제인(朴齊仁)을 두었는데, 송암과 황암 은남명(南冥)의문인이다.큰아들송암은수우당(守 愚堂)최영경(崔永慶),각재(覺齋)하항(河沆),서암 (棲巖) 정지린(鄭之麟) 등 남명의 고족(高足)들과 친밀하게 교유하였으며, 유일로 천거되어 선공감역 (繕工監役)을지내고,향리에서중망을받았다.저서 로 2권 1책의 『송암집(松 옰 集)』을남겼으며,사후평 천서원에향사(享祀)되었다.둘째아들황암역시남 명선생의고제(高弟)로,한강정구가은덕군자(隱德 君子)라고극찬하였다.1599년(선조32)송라도찰방 (松蘿道察訪)으로나갔다가2년만에사직하고낙향 하였다.그 후형조좌랑(刑曹佐郞)과 군위현감(軍威 縣監)을 거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세자(世 子)에게븮대학(大學)븯을강론했고,제용감판관(濟用 監判官)으로퇴관하여학문에만진력하여사림의추 중을 받았다.사후 평천서원에 향사되고,저서로 3권 1책의 븮황암집(篁 散集)븯을 남겼다. 셋째 아들 미암 (薇散)박제복(朴濟福)은호조판서에추증되었다. 송암의 아들 박이(朴 촬 , 1541~1585)의 자는 언휘 (彦輝)이고호는송계(松溪)이다.서암(棲巖)정지린 (鄭之麟)의 문인으로 문학과 덕행으로 이름이 드러 났으며, 사위는 정대형(鄭大亨)이다.황암의 아들 박 율 ( 朴 )은자(字)가용휘(用輝)이며,호는일관당 (一貫堂)이다.효자로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증 직되었다. 미암의 아들 박완(朴琓)은 자(字)가 내실 (乃實)인데,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사재감 첨정(司 宰監僉正)과함평현감(咸平縣監)을역임하였다. 딸은 셋을 두었는데, 장녀는 초계(草溪) 정지호 (鄭之虎)에게, 차녀는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현 손(玄孫)으로 군수를 지낸 조곤(趙 껸 )에게, 막내는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공도공(恭度公) 이문화(李 文和)의7대손으로인산군(仁山君)에추봉(追封)된 이인(李寅)에게출가하였다. 송계 박이는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증직된 봉계 재(奉戒齋) 박종원(朴宗元)과 박경원(朴慶元),박길 원(朴吉元)의 세 아들을 두었고.일관당 박율은 여헌 (旅軒)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간송(澗松)조임 도(趙任道),조은(釣隱)한몽삼(韓夢參)등과가까이 지낸농은(農隱)박도원(朴道元)을아들로두었다. 모암의 유고(遺稿)는 손자인 송계(松溪)박이(朴 촬 , 1541~1585)의 문집과 합본으로 되어 있다. 븮모암 송계합고(茅菴松溪合稿)븯는 모암의12세손 이남(夷 南) 박규환(朴圭煥, 1840~1923)이 유문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간행하였다. 합고(合稿)가 간행되어진 시 기는박규환이세상을떠나기전인1900년대초기로 판단된다. 박규환이 지은 발문에 의하면, 1800년대 후반에 그의 종조부가 모암의 유고를 수집하고, 가 승(家乘)과 읍지(邑誌) 및 제현들의 사우록에서 모 암과 관련된 기록들을 발췌해서 실기(實記)를 만들 었던것으로되어있다.이를보면박규환의종조부가 븮모암실기븯를만든뒤,후일박규환이이를다시수정 보완하고 그기에 븮송계집븯을 합하여 븮모암송계합고 븯를간행하였다는것을알수있다. 그 형태는 4권 1책의 목활자본이다. 1면이 10행이 며,1행의자수는20자이다.표제는‘모암송계합고집 (茅菴松溪合稿集)’이고, 내제와 판심제는 각기 『모 암집(茅菴集)』은 븮모암선생 문집(茅菴先生文集)븯으 로,『송계집(松溪集)』은 븮송계 문집(松溪文集)븯으로 되어있다.4권중앞의2권은『모암집』이고뒤의2권 은『송계집』이다.권두에동향후학인일산(一山)조병 규(趙昺奎,1846~1931)와후손인이남박규환의서문이 차례로 실려 있다. 한강 정구가 읍지(邑誌)에 그 행적을 실었으며,평천서원(坪川書院)에제향되었다. 권1은모암이직접남긴글들로이루어져있다.시 (詩)3수,서(書)1편,소(疏)1편,훈(訓)1편,논(論) 1편이수록되어있다. 시(詩)는 칠언절구 2제 3수이다. 건원릉(健元陵) 참봉으로재직하면서지은븮행건원릉침랑시유감(行 健元陵寢郞時有感)븯2수와,자신이거처하던모암서 사(茅菴書舍)에서의감회를읊은븮모암서사운(茅菴 書舍韻)븯1수가있다. 서(書)는 한양에서 참봉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 보낸 븮상가대인서(上家大 人書)븯1통이 있다.연로하신 아버지 봉양을 위해 벼 슬을사직하고돌아가뵙고자한다는내용이다. 소(疏)는참봉사직을청한븮걸체침랑소(乞遞寢郞 疏)븯1편이있다.5대독자로서일흔의늙고병든아버 지봉양을위해사직을허락해주기를청하였다. 훈(訓)은두아들박제현(朴齊賢)과박제인(朴齊 仁)을산천재(山天齋)로보내남명(南冥)선생에게 학문을 배우도록 훈계한 송이자 산천재훈(送二子 山天齋訓)이있다. 논(論)으로는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는 고 사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문례어노담론(問禮 於老 論)이 있다. 주된 논점은 “배우는 사람은 한 부분의앎이있더라도전체를모른다면반드시전체 를 아는 사람에게 나아가 물어야 한다.이 물음은 모 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성인은 비록 전체를 알지만혹일부분을몰라도일부분을아는사람에게 나아가 묻는다.이는 아는 것을 더욱 그 앎에 이르게 하는것이다.”라는내용이다. 권2는 부록으로 총 11편의 글이 실려 있다. 시, 만 사(輓詞), 가장(家狀), 행장(行狀), 묘갈명, 봉안문 (奉安文)등이수록되어있으며,마지막에는박규환 의발문이있다. 시 븮모암서사차운(茅菴書舍次韻)븯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75)가 모암이 지은 「모암서 사운(茅菴書舍韻)」에차운하여지은칠언절구이다. 만시(挽詩)는 서암(棲巖) 정지린(鄭之麟, 1520~1 600)이모암의죽음을애도한것이다. 가장(家狀)은 모암의 11세손 박영일(朴永一)이 지었다. 행장(行狀)은생원안몽백(安夢伯,1762~?)이지었다. 묘갈명(墓碣銘)은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18 24-1904)가지었다. 븮평천서원봉안문(坪川書院奉安文)븯은 군북면 명 관리에 있었던 평천서원에 모암 박희삼과 두 아들 송암 박제현븡황암 박제인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지 은 글로,의령 현감을 지낸 순계(醇溪)이정리(李正 履,1783~1843)가지었다. 상향문(常享文)은 븮평천서원봉안문븯과 함께 현감 이정리가 지었다.븮서원강당려문(書院講堂 文)븯은 평천서원의강당을지으면서지은상량문으로,생원 안몽백이지었다. 븮별묘봉안문(別廟奉安文)븯은 평천서원 별묘(別 廟)에모암의위패를봉안할때지은글로,모암의11 세손박문식(朴文植)이지었다. 상향문(常享文)은 븮별묘봉안문븯과 함께 박문식이 지은것으로,별묘에제사지낼때쓴것이다. 발(跋)은 모암의 12세손 박규환이 지었다. “당세 에도의로 사귄사람으로남명 조식이있고,한강정 구가 함안 읍지에서 그 덕행과 문학을 기렸으니, 이 것으로 믿을 수 있다. 살아서는 산림에서 독선기신 (獨善其身)하고, 돌아가서는 서원에서 향사(享祀) 하니, 한때 벼슬길에서 이름을 날린 사람과는 비교 가되지않는다.”라는내용이다. 모암의 가문은 충효(忠孝)와 절의(節義)의 정신 이 맥맥히 이어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멀리는 신라 의 충신 박제상이 있고, 가까이는 고조부 박앙이 있 다. 절의를 지켜 은둔했던 박앙은 벼슬길에 나서는 아들 박기명에게 “조정에 나가는 것과 산림에 사는 것은다르니,삼가고또삼가하라”고경계하였다.박 기명은신천군수로재직중에선정을베풀어왕으로 부터친히유서(諭書)와관복감한벌을하사받고청 백한관리라는칭찬을들었다.평상시에오직의(義) 를쫓고세속에구애되지않은그처행을기리어,븮함 주지븯븮인물편븯에등재하였다.조부박정화역시효성 과우애가독실하였으며대대로전해진덕행을이어 서 향당의 모범이 되었는데,당시 사람들이 “청백리 집안에 또 군자가 나왔다”라고 찬양하였다.부친 박 유는 진사로 태학(太學)에 있을 때 문학과 행의(行 誼)로동료들로부터추중을받았다. 혈혈단신의 몸이었던 모암은 선대의 절효 정신을 이어받아 가통을 반드시 이어나가야할 막중한 책무 를 가졌던 것으로 나타난다.우선 모암이 남긴 몇 편 의 글 중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내용 중의 하나 가깊은효심(孝心)이다.모암을침랑벼슬에천거하 면서 그 효행에 대해 이르기를 “천성이 지극히 효성 스러워 신명에게 물어볼 수 있나니, 안회(顔回)의 양지(養志)를 계승하고 증삼(曾參)과 민자건(閔子 騫)을 아우른듯하다”라고 하여, 그 효행을 높이 칭 양하였다. 침랑으로 재직 시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 게 올린 편지 븮상가대인서(上家大人書)븯에 그 효심 이분명하게드러나고있다. 『생각건대,사람에게는 도리가 있습니다.집에 들 어가서는 부모님을 섬기고 조정에 나가서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직분 상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그러 므로 지금 처한 곳에서 제 자신의 직분을 다해야 하 겠지만,저의 경우는 아버님 연세가 이미 높고 아무 형제도 없습니다. 곁을 떠나 도성에 머무는 것은 인 정이나 이치로나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다음 달 에 사직하고 돌아가 뵈올 계획입니다. 더 많이 잡수 시고강녕하시기를엎드려바랍니다.』 참봉직을 사직하는 상소 븮걸체침랑소(乞遞寢郞 疏)븯에도 짧고 평이한 문장 가운데, 임금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과 더불어 부친에 대한 효성이 깊게 잘 나타나고 있다. 부임한지 수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 만부친의봉양을위해간절하게사직을청하였다. 『저희집안은5세동안단신으로내려와가까운친척 이 없고, 아버지는 연세가 일흔으로 늙고 병들어 숨결 이 매우 약하고 위태합니다. 독자인 신(臣)이 천리 밖에 떠나와있으니,애태우는마음이진실로어떠하겠습니 까?온백성의부모와같으신전하께서는세상을효로 다스리십니다.어미에게효도하는까마귀와같은저의 사사로운정을밝게살피셔서특별히커다란은혜를내 리시어침랑의직에서물러나병든아버지를돌아가서 봉양할수있도록허락해주시기를빕니다.』 븮모암집븯에 수록된 2제 3수의 시 중, 다음의 [행건 원릉침랑시유감(行健元陵寢郞時有感)]에서 모암 의 애국충정심(愛國衷情心)과 직분에 충실하고자 하는정신을읽을수있다. 『天命當時太祖興(천명당시태조흥) 하늘의 명을 받 을당시태조께서일어나시니/我東基業萬年弘(아동기 업만년홍)우리동방터잡은왕업만년토록넓고크네/ 於乎臣子追慕地(어호신자추모지) 오호라, 신하가 생 각하며그리워하는곳은/殷有桐宮漢長陵(은유동궁한 장릉)은나라에있는동궁과한나라의장릉이라네』 『聖朝恩旨降遐方(성조은지강하방) 어진 조정의 임금님 뜻이 먼 지방에 내려와/ 草莽微臣荷寢郞(초 망미신하침랑) 초야에 사는 미천한 신하 침랑에 제 수되었네/ 職事虔恭將免罪(직사건공장면죄) 맡은 일 조심히 행하여서 장차 죄를 면하려니/ 愚衷夙夜 不堪惶(우충숙야불감황) 어리석은 마음 밤낮으로 두려움감당치못하네』 첫째수에서는건원릉(健元陵,태조이성계의능침) 을관리하면서태조이성계의조선건국을추숭하는마 음을 담았으며, 둘째 수에서는 벼슬을 내려준 임금에 대한감사함과직분을다하고자하는충정을피력하였 다.태조이성계의능침을은나라를건국한탕왕(湯王) 의 능묘 곁에 세운 별궁인 동궁(桐宮)과, 한나라 고조 유방의능침인장릉(長陵)에비견하여그숭모의뜻을 나타내었다. 곧 태조 이성계의 유업을 은나라 탕왕과 한나라고조유방의위적(偉績)에견주었다. 이상과같은평가에서알수있듯이,타고난아름다 운 자질에 유자로서의 반듯한 조행을 실천함으로써 당시 주변 사람들로부터 두루 학덕을 겸비한 어른으 로칭송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일생 동안 효행을 실천하며 가학을 계승하기 위해 헌신했던 모암의 행 적을 안몽백(安夢伯)은 모암의 행장에서 요약하여, “몸소 효도를 행하며, 지리산 아래 강우지역의 덕행 과 학문이 있는 문중(門中)과 교유하였다.집안에 이 어내려오는학업을닦고자식을바르게가르치는노 력으로 후손들을 무궁토록 일깨움으로써 이름난 아 들과어진손자들이더욱번성하였다.나라안사람들 이모두행실이바른가문이라고추숭하니,선행을쌓 은 집안에 남겨진 경사가 성대하다 할 것이다.”라고 우러러 찬양하였다. 남긴 글이 많지 않아 충분히 고증 할수는없지만,이상의기록만으로도그효성이어떠 했는지를알기에부족하지않다고여겨진다. 모암은조선초기함안에이거(移居)한고조부박 앙(朴 왑) 이후 3대 동안 단신(單身)으로 이어져 내 려오던 가통을 이어 받아 학문적 기반을 공고히 함 으로써 함안 지역뿐만 아니라 경상우도에까지 가문 의 위상을 높인 경주박씨 함안파의 중조(中祖)라고 할수있는인물이다. 븮소학븯에 바탕하여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았으 며,과거를포기하고경사(經史)와정주(程朱)의성리 서를학문의귀결처로삼았다.특히남명(南冥)을종 유하여 그 학덕을 인정하고, 두 아들 송암 박제현과 황암박제인을그문하(門下)에보내어학문을익히 게 하였는데, 후일 송암과 황암이 남명학파의 고제 (高弟)반열에오름으로해서남명학의발전과확산 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통을 계승 발전시키 고자 했던 모암의 뜻도 자연스레 성취되었다. 이 같 은뛰어난조행으로62세와63세되던해유일(遺逸) 로 천거되어 연이어 침랑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효 자답게 부친의 봉양을 위해 사직하였다. 사후 븮함주 지븯에“덕망이있는어른다운풍도를가졌다[有長者 風]”라 기록되고, 평천서원에 두 아들과 함께 제향 되었다.남아 있는 글이 적어서 충분히 그 학덕을 조 명할 수는 없었지만, 후인들이 그 품행을 본받기에 는충분한것으로판단된다. (본 글은 2021년 함안문화원 주관 ‘함안의 인물(경 주박씨편)’학술대회원고중변진희동방한학연구원 이사겸연구원의글을옮긴것입니다.) 함안지역학문의거두모암 박희삼선 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생애(生涯)와가계(家系) 모암선생묘소,경남함안군군북면명관리.모암선생묘비 茅菴集의編纂과內容 모암집 절효전가(節孝傳家)의가통계승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