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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0월31일 화요일 11 (제202호) 독자마당 박석무 다산연구소이사장 풀어쓰는 茶山이야기 1801년 신유년, 신유옥사가 일어나 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유배살이로 떠나 야 했습니다.한창 일할 나이이던 40세의 다산, 죄가 없음을 인정받고도 중상모략 에 휩싸여 풀려날 기약 없는 귀양살이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유배 초기에야 마음의 안정을못 얻어 괴롭고 아픈 시간 을 보냈지만,오래지 않아 마음의 안정을 얻어 좌절과 낙망의 마음에서 훨훨 털고 일어나 학문연구에 생애를 바칠 각오로 독서와 저술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쓸쓸하고 외롭기 그지없던 때가 많았지 만, 독거생활의 편안함을 오히려 책 읽고 글쓰기 좋은 환경으로 여기면서 본격적으 로 수기(修己)의 학문과 치인(治人)의 학 문에온정성을기울였습니다.다행히찾아 오는제자들이있어,그들과학문을토론하 고,참으로난해한중국의고경(古經)들에 대한 연구는 흑산도의 중형(仲兄)과 토론 하면서 유교철학의 진리를 밝혀내고 있었 습니다.복잡한가정사나세상일에개의치 않고고요하고적막한주위환경에불평이 없다고여기면서도,그래도풀려나는일에 도마음을기울이지않을수없었습니다. 인간이란 그럴 수밖에 없다고 여기면 서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못했 고그리운아내와가족,속세의일에대한 그리움을감추지못했습니다.“금년에다 섯 가지 대사면이 이루어졌는데 탐관오 리와 살인강도범까지 석방되지 않은 사 람이 없었다 합니다.그러나 사헌부의 탄 핵안에 이름이 올랐던 사람(국사범이나 역적죄인)은거론조차할수없었답니다. 이것은 그런 사람들을 엄하게 단속하려 는 것이 아니라 까마득히 잊어버렸기 때 문일 것입니다. 득세한 사람과 실세한 사 람은 본래 서로 잊어먹기 마련이니 한탄 할것있겠습니까?(「答仲氏」:유배지에서 보낸편지)”라고말하여권력자들은모략 중상으로 내친 국사범들은 아예 생각하 지 않고 석방에 대한 문제는 거론하지도 않아잊어먹기마련이라는것입니다. 사면령이 내리지 않아 모든 죄수들이 혜택을 받지 못할 경우야 자신들의 누락 을 한탄할 필요도 없지만, 살인강도범이 나 흉악범 같은 범죄자들은 풀어주고 죄 질이나 범죄 정도가 더 나쁘지 않는 사람 들은 풀어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그 마음 이 아프고 쓰리겠는가요! 기록으로 보면 다산도 여러 차례 사면령에 해당되어 곧 풀려난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반대파들의 저지로 끝내 풀려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대사면령을 내려 대부분의범 죄자들을 풀어주 면서도 자신들은 거론조차 안했다 니, 같은 처지에 있는중형과주고 받은편지에서그 런아픔을실토하 고있었습니다. 갇힌사람들이야언제라도풀려나기를 바라고 유배 사는 사람들이야 언제라도 해배되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입니 다. 18년의 긴긴 세월, 행여라도 해배의 소식이 오기를 그렇게도 기다렸지만, 그 길던 세월,그런 해배명령은 오지 않았습 니다.그래도 다산은 참고 참으며 학문하 는 재미로 갇힌 자의 괴로움을 이기면서 끝까지견딜수있었습니다.그런결과가, 지내놓고 보니 위대한 학문적 대업을 이 룩할 기회를 얻었으니,위기를 기회로 바 꾼 다산의 정신력은 그래서 만인의 귀감 이 된다고 여겨집니다.남은 기쁘고 즐거 운데,나만슬프고외로우면상쇄할수없 는비애가더가중될수밖에없습니다.남 들은 풀려나는데,우리만 갇혀 지내야 한 다는 불행,그것까지 이겨낸 다산의 풍모 에마음이기울여집니다. 득세한 사람,실세한 사람을 잊는다 대한민국 경제의 1970년대 고도성장은 새마을운동의뒷받침이있었기에가능했 다.‘잘살아보세’라며농로개설,지붕개량, 마을안길과 하천의 정비 등 농촌발전을 위한 인프라 구축사업이 전국적으로 마 을별로대대적으로이뤄졌다.중앙정부와 지방정부, 官과 民이 하나로 연결되어 근 면·자조·협동을 외치면서 에너지를 총력 화한민관합동지역사회개발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이 없었더라면 한국경제는 어찌 되었을까? 고도경제성장을 가져오 지못하고잘해야 초기중진국수준에머 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이유는 간단하 다. 새마을운동과 경제발전 간에 선순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농로가 개설되 고 마을 안길이 정비되었기에 리어카와 경운기가 보급될 수 있었다. 지붕개량이 되었기에 볏짚 필요가 없어져 통일벼 재 배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다수 확 품종인 통일벼가 재배되면서 쌀 자급 도 가능해졌다. 농사짓기와 농촌운영에 인력이 절감되니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마친 젊은 남녀인력이 대거 도시의 공장 에 취업하여 하루에도 몇 개씩 생기는 공 장들의 근로자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농 촌의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의 판로도 형성되는 등 내수 기반을 갖추게 된 것도 새마을운동의 큰 공로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이미 선진국이다. 세 계 10대 경제대국과 G7 반열의 국제정치 경제적 위상 을 갖고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은 위태 위태한 상태 를 면하지 못 하고 있다. 국 내총생산(GD P)의 85프로를 수출과 수입의 무역에 의 존하고 있고, 호전적인 북한과 일촉즉발 의 대치상황을 이어가고 있으며,미.러.중. 일의틈바구니에서균형을잡아야하는등 경제와안보가국제정치와국제경제에크 게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 각국과의좋은관계유지가필수적이다. 반면에 국제정치와 국제경제 상황은 결코 녹녹지 않다.중국의 급부상에 따른 미.중 경제갈등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 쟁은 새로운 블록형성과 신냉전체제를 가져오고 있고, WTO와 FTA로 자유무 역이 활성화되는듯 싶더니 어느새 자국 이익 중심의 보호무역주의가 고개를 내 밀고 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이슬람 교를믿는나라들과 다른 나라 간의 갈등 이 확대재생산 되는 등 국제안보상황도 심히위험한상태로가고있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혼란스러운 국제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세계 각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또 글로벌 중추국가 로 도약할 수 있겠는가? 기발한 지혜가 필요하다. 여태까지 없었던 새로운 방법 이라야 한다.세계 각국이 한국에서 가져 가고싶은것 중에 여태까지 가져가지 못 했던것을새롭게주면된다 .우리는후진 국에서 중진국을 거쳐 선진국에 진입한 세계 유일한 나라이다. 그래서 개발도상 국들을 포함한 전 세계 국가들은 우리 한 국의 국가발전 비결을 가져가고 싶어하 고, 우리가 그들의 경제발전과 사회발전 도도와주기를바라고있다. 누가 주어야 하고,무엇을 주어야 하는 가?대한민국중앙정부는현재와같이여 전히 국가외교 차원의 경제외교를 지속 하면된다.새롭게나서야할주체는지방 자치단체와 민간기업이다. 이들이 개도 국을 포함한 전 세계 각국 정부 및 그 나 라 국민들과 연계하여 활동하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외교부 산하 한국국제 자원봉사회(KIVA)가 2600여 기업과 11 0개 주한외국대사관을 코리안 서포터즈 관계로 연결하고,이어서 17개 시도와 17 0여 시군을 외국대사관과 연결하여 대한 민국 공공외교 거버넌스체계를 구축 중 에있다고한다.시도지사등지자체가친 기업적조장행정으로민간기업을활성화 하면 기업들은 기술과 사랑 나눔으로 개 도국의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을 돕기에 세계를 아우르는 경제새마을운동이다. 지자체와 기업이 힘을 합쳐 한국을 잘 살 게하고세계를잘살게하기에아주중요 한 시대적 과제이다. 경제새마을운동은 국내적으로는기업의경영환경을친기업 적으로 바꾸면서 해외시장을 쉽게 공략 하고,국제적으로는 전 세계 각국이 우리 한국과 좋은 관계를 맺게하는 운동이다. 범세계적도약운동이다. 글로벌중추국가도약은경제새마을운동으로 박승주전여성가족부차관 [고전산문]- 아 버 지 의 얼 굴 주상이경연에나아갔다.강(講)이끝나자……사헌부지 평 이세광이 아뢰기를, “……신은 주상이 궐내에 화공(畵 工)을 모아놓고 초목과 금수를 본떠 그리게 하셨다고 들었 습니다.……전하께서그림그리는일에마음을두시니외물 (外物)을 완호(玩好)하는 마음이 점차 심해질까 걱정스럽 습니다.”하니, 주상이 말하기를, “이번에 화공에게 본떠 그 리도록 명한 일이 어찌 완호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그림은비록정치와상관이없으나예복(禮服)에놓는수는 그림이없으면만들수없으니본디없을수없는것이다.이 왕없을수없다면또한그기술을정교히하지않을수없다. 선왕의 영정을 고쳐 그리거나 중국 사신이 그림을 구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그림 그리는 일을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최반과 이세광 등이 아뢰기를, “신들은 그림 그리는 일을 폐지하길 원한 것이 아닙니다.무릇 임금 은 무엇을 아끼고 좋아하는 일을 삼가야 하니 아끼고 좋아 함이극에달하면반드시폐단이발생합니다.”하였다.주상 이 노여운 목소리로 승지에게 소리쳤다.“그림 그리는 일을 폐지하라!” [해설]성종 9년 가을. 어느 날부턴가 성종이 수상한 명을 내리기 시작했다.온갖 종류의 새와 초목을 구해 오게 하더 니, 화공들을 궐내로 불러 모아 그것들을 똑같이 그리도록 한 것이다.그러고는 그림을 잘 그린다고 소문난 대사헌 김 뉴(金紐)에게명하여그일을감독하게까지했다. 결국대간(臺諫)이우려의목소리를내기시작했다.궐내에 서그림을그리게한것도그렇고,중책을맡은대사헌에게그 림감독따위를맡게한것도그렇고,근래지시한사안들을보 니임금이그림에지나치게관심을쏟는것같다는말이었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서화(書 壯 )를 좋아하는 것은 불길한 조짐으로 여겨졌다. 지난 역사를 돌아봤을 때 서화에 마음 을 뺏겨 나라를 그르친 임금이 얼마나 많았던가. 당나라 현 종(玄宗),송나라 휘종(徽宗)과 같은 중국 황제들은 물론이 고 바로 전조(前朝)인 고려에도 공민왕(恭愍王)의 사례가 있었다.이때문에특히경연자리에서신료들이혈기왕성한 청년왕에게‘완물상지(玩物喪志)’를언급하며정치외에잡 다한취미에몰두하는것을경계하는일이자주있었다. 성종도대간이우려하는것이무엇인지모르지않았다.그 래서처음에는차분한어조로자신의의도를해명했다.근래 의 일은 모두 화공의 그림 실력을 길러주기 위해 한 일이지 그림을 즐기려고 한 일이 아니었음을 밝히는 한편, 국가 중 대사에는그림이반드시필요하다는점도강조했다.그런데 대간들의반응이좀엉뚱했다.그림을즐기려고한일이아니 라는 말을 못 들은 것인지, 또다시 그림을 지나치게 좋아하 면안된다는말만되풀이한것이다.결국성종은분을못이 기고고함을내지르고말았다.‘그냥싹다없애버리라.’고. 상황이 어찌 됐든 한 나라의 임금이 신하 앞에서 이토록 격앙된 태도를 보이다니 썩 훌륭해 보이는 장면은 아니다. 일견자신의떳떳하지못한취미를들킨부끄러움에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성종이 그간의 수상쩍은 행 보에 대해 해명하면서 ‘선왕의 영정(影幀 초상화)’을 언급 한 순간,내 마음이 성종을 진심을 믿어주는 쪽으로 기울었 다.그한단어에서성종이 10대의소년왕이었던 시절에겪 었던특별한사건이떠올랐기때문이다. 성종3년의일이다.이해성종은선대(先代)왕과왕비(소 헌왕후,세조,예종)의 영정과 대왕대비(정희왕후)의 영정, 그리고 친아버지인 의경왕(懿敬王)의 영정까지 총 5개의 영정을 제작했다.영정 제작이 끝난 후에는 영정을 그린 화 공들을 포상하여 벼슬을 올려 주었는데, 대간들이 이 조처 에크게반발하여한동안조정이소란스러웠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도화서 별제(圖 壯 署別提) 최경(崔 涇)과 안귀생(安貴生)이었다. 이들은 기존 품계가 통훈대 부(通訓大夫정3품당하관)였으므로이번에벼슬이오르면 당상관인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게 되었다.대간들은 잡 직(雜職)인화공에게벼슬을상으로주는것도참람한일이 거니와,화공이 당상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 이라며반발했다. 성종은 영정 제작이 선왕(先王)을 위한 사업이라는 점을 명분으로내세우며포상을강행하려했지만,열흘이넘도록 매일같이빗발치는항의에결국왕명을철회하였다.그러자 수렴청정중이던정희왕후가나서서대간들을나무랐다.성 종이 그토록 화공들에게 벼슬을 주고 싶어 했던 진짜 이유 를 밝히며 그 갸륵한 성심(聖心)을 기어코 꺾어버린 데에 대해유감을표한것이다. 대왕대비가전교하기를,“주상이태어난 지두어 달만에 아버지를 여의어 의경왕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지금최경등이그림을그리니,내가봐도참닮았다.주상이 진심으로 기뻤기에 그 공로에 보답하려고 했던 것이다.… … . ”『成宗實錄3年6月4日』 성종의 친아버지인 의경왕은 세조가 잠저(潛邸) 시절에 얻은 맏아들로, 세조가 즉위한 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끝내왕위에 오르지는 못했다.책봉 3년째되던해9월에급 작스럽게 병에 걸려 사망했기 때문이다. 성종이 태어난 것 은 그해 7월 30일이니,정희왕후는 두어 달[數月]이라고 했 지만실상태어난지한달여만에아버지를여읜셈이었다. 사진도 동영상도 없던 시대였다. 태어난 직후 고아가 된 자식이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단은 그림뿐이었다. 그러니 의경왕의영정이제작되기전까지성종에게아버지의얼굴 은 미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얼굴 모르는 아버지가 그 리울 때는 아버지를 닮아있을 형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자기 얼굴을 냇물에 비춰보며 그저 상상에 기대 그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상상만 해오던 아버지의 모습을 마침내 영정을 통해 처음 보게 되었을 때 성종의 감격은 어떠했을까?더욱이 영정 속 의경왕의 모습 을 보고 그의 친어머니인 정희왕후도 ‘참 닮았다’고 인정하 였으니,그감격은배가되었을것이다. 그런데신숙주의문집에실린‘추모록서(追慕錄序)’에따 르면,수년 전에 사망한 의경세자의 생전 모습이 이토록 생 생히 영정에 담길 수 있었던 것은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 의 살뜰한 배려 덕분이었다고 한다. 의경세자의 병이 위독 해져그의죽음이확실해졌을때세조는단장(斷腸)의슬픔 속에서도 아들이 남긴 어린 손자들을 생각했다. 어린 손자 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도록 그 마지막 모습을 남겨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인물화로는 당대 최고라 일컬어지던 화공 최경을 불러 세자의 마지막 모습을 초도 (草圖 밑그림)로 그리게 하였다. 성종이 의경왕의 영정을 제작할 때 바로 그 초도를 토대로 의경왕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고하니의경왕의영정은곧세조가성종에게남겨준 유산이었다고도할수있을것이다. 성종이그림을좋아하고즐겼던것은분명한사실로보인 다.그의묘지문(墓誌文)에‘서화(書壯 )는오묘한경지에다 다랐다.’라고 하였고 보면 성종이 그림에 대단한 실력을 지 녔음은이미공인된사실이었음을알수있다.또유몽인(柳 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을 보면 조선 전기에 그림을 보는 안목을 지닌 두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 데그중한명은조선전기최고의천재화가로불리는안견 (安堅)이고, 나머지 한 명은 성종이다. 이런 야담이 전해진 다는 것은 당대에 성종이 그림에 조예가 깊다는 소문이 궐 밖으로까지퍼져있었음을의미한다. 물론 그림에 대한 이런 성종의 재능과 애호를 모두 아버지 의영정과관련한그사연하나로만설명할수는없을것이다. 다만성종이 갖가지 금수·초목을모아화공들에게그림훈련 을시키면서‘선왕의영정을고쳐그리는’국가의중대사를위 한것이라고해명한부분만큼은이사연에비추어봤을때진 심어린말이었다고믿어줄수있지않을까.어쩌면그진심은 아버지의 얼굴을 처음 알게 해준 소중한 그림을 영원히 보존 하고자하는자식으로서의효성과할아버지세조가자신에게 그랬듯어버이를여읜후손들의마음을더욱곡진히어루만져 주고자하는아버지의사랑에서비롯된것일지도모른다. 글쓴이최소영한국고전번역원연구원 [본 글은한국고전번역원에서 메일링서비스를통해 받은 것입니다.] [원문]御經筵븦講訖,……世匡曰:"……臣聞禁內會壯 工,摹 寫草木禽獸븦……殿下留心壯 事, 恐有玩物之漸븦" 上曰: " ……今之命工摹壯 ,豈爲玩好而然哉?圖壯 雖不關政治,上衣 下裳빪사文章, 非壯 不得, 則固不可無븦 旣不可無, 則亦不 可不精其術也븦 脫有先王御容改 壯 事、中國使臣求壯 者, 其可廢圖壯 乎?" 崔潘、世匡等啓曰: "臣等非欲廢圖壯 也븦 大抵人君當謹好尙, 好尙之極, 必有其弊븦" 上렐 聲呼承旨 曰:"其罷圖壯 事븦"『성종실록(成宗實錄)』9년 8월 4일 1번 째 기사 븮생태도시븯를 학문적 용어를 떠나 간단 히 말하면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도시 뷻 로 정의 할 수 있다. 지난 2002년 민선 3 기 시절, 담양군은 우리나라 지방자치단 체 최초로 생태도시라는 용어를 담양군 브랜드화하고 생태도시 정책을 군정지표 로삼았다. 생태도시 브랜드화는 우리나라에서 담 양군이 최초였지만 세계적으로는 담양보 다 훨씬 앞서 세계 많은 도시가 지향하고 있었다.서구유럽은생태유럽이라고불릴 만큼 대부분 도시가 시행하고 있다. 일본 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 르는 모든 도시는 생태도시 정책이 일상 화되어있다. 그러나 사실은 생태주의 원형은 동아 시아 문화권에있다.인간과 자연을 한 생 명으로 전제하는 동아시아전통적인 생명사상에 그 뿌 리가있다. 불교는 만물이 모두 한 몸으로 연 결되었다는연기설 을 주창했다. 노장 사상은 자연흐름에 일치하는 행위를 무 위자연이라 하여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 다. 유학 또한 자연철학인 주역의 음양론 체계에의존하고있다. 이런 유불선 사상을 통합하여 되살려 낸것이우리한민족의‘풍류사상’이다. 신라 말 사상가 최치원은 <난랑비서> 에서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한다.풍류사상은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군생(뭇생명) 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한다.” 라고 하여 ‘뭇생명과 접촉하여이를 교화한다.’이 말 은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생태도시 정의 에갖다써도 딱들어맞는 말이다.우리나 라 생태주의는 이토록 오랜 역사와 깊은 철학이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생태주의 철학은 자 연과 인간이 함께 공존하는 철학으로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인문학과는 뗄레 야 뗄 수가 없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다는 것은 어려 운 일이 아니다. 인문학은 사람을 생각하 는,사람을이해하는말그대로사람에관 한학문이다.그러기 위해서는 폭 넓은 독 서와깊은사색이필수적이다. 담양군 전체가 생태도시로서 멋진 정 원이라고 표현되는 담양은 사색하며 독 서할 수 있는 인문학도시로서도 손색이 없다. 그래서 담양군은 2016년 전국 최초로 담양군을 븮인문학 교육특구븯로 지정되게 함으로서 인문학으로 미래 천년을 디자 인할수있는기반을다지고있다. 생태도시를 지향하는 세계적인 도시는 많다. 그러나 븮인문생태도시븯를 추구하는 세계적인 도시를 나는 아직까지 들어 본 적이없다. 세계적인 생태도시로 유명해서 세계 각 지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 오는 브 라질 꾸리찌바처럼 대한민국 담양군도 븮인문생태도시븯로세계적으로알릴수있 는절호의기회가왔다. 더 나아가 담양군이 븮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에코사피언스븯 라는 새로운 인류를 교육시키고 체험하고 양성하는 곳으로 거듭나아야한다. 최근 갈수록 심해지는 기상이변과 지 진, 쓰나미와 화산폭발 등에 의한자연재 해로 인류 생존이 위태로운 상태에 이르 렀다. 이렇게 지구에서 자연재해가 갈수 록심해지는이유는무엇일까? 이러한 거대 지구의 변화를 제대로 설 명할 수 있는 이론이 1972년 의 화학교수 러브록(Lovelock)교수에 의해 제시되었 는데,이것이지구를생명체로보는븮가이 아이론(Gaiatheory)븯이다. 즉 지구도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인류 가공존할방법을찾아야한다는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가 븮호머사피엔 스븯에서븮에코사피엔스븯로변해가야한다. 또한현재는4차산업혁명시대이다.치 열한 글로벌 경쟁과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불확실한 시대이다.4차 산업혁명 은 “급진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기술을 활 용한 비즈니스 혁신으로 인간에게 고귀 한 가 치를제공하는사건”이다.기술과비 즈니스를통해사람에게가치를제공하는 “사람을 위한 혁명” 즉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사람이필요한시대라는의미이다. 담양,인문학생태도시로가는길!븮담양 의 미래가 범지구적 미래로 나아갈 수도 있다!븯 븮호머사피엔스븯에서 븮에코사피언스븯로 인류를변화시킨다! 이 두 가지를 범지구적으로 담양군이 선두에 설 수 있다는 것 생각만이라도 가 슴이벅차오지않는가? 담양,인문생태도시의진화 박 철 홍 뱚발뱞뱞행뱞뱞인:박순구 뱚취재편집:박상섭 뱚경영지원:박재기 기사제보븡광고신청븡구독안내 대표전화(053)588-7300 FAX(053)581-0067 뱚구독료년40,000 입금계좌:농협453013-55-000691 예금주:한빛신문 뱚뱜 42612 대구달서구달구벌대로1221(이곡동538-2)성창B/D5층 뱚뱜 본지는신문윤리강령및그실천요강을준수합니다 (2007년1월12일등록번호대구다-01225) 500만박씨성손의대변지 2007년1월24일창간(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