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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 선생님은?
소남 선생은 1883년 4월 16일 완도군 고금면(고금도) 청룡리에서 완도군 창군(創郡)과 완도향교 창설의 공로자이신 김광선의 6남중 2남으로 태어났다.
국운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고 암운이 짙은 한말, 고금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던 심제 이도재(李道宰)선생으로 부터 한문을 수학하고 그의 주선으로 1908년 결연히 상투를 자르고 상경하여 융희학교에 입학하였다. 3년간 신학문을 수학,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한제국 제1호로서 고금면 회룡리에 간이학교를 설립하고 후진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한인교사 강제 퇴출이 이어지고, 일본 상인배의 횡포와 폭리가 이어졌다. 그 해 8월 17일 즉시 완도읍 완도청년회 개최 석상에서 "우리 완도는 안도인의 완도이지 타인들의 완도가 아니다. 모름지기 완도인이 이를 지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관리의 명령에만 따르지 말고 자진해서 교육과 경제 등 개량할 것은 개량하여 완도의 발전 진보를 계회해야한다"고 역설한 뒤 "완도는 타 군에 비하여 물가가 고가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참석한 청년회원을 중심으로 하여 완도소비조합을 조직하고 물화의 저가 공급과 이익배당을 목적으로 하여하 할것이다"고 제의하여 김태현, 이승호, 이제철 등의 동지들과 더불어 9월 1일 항일구매조합인 '완도상회'를 열고 스스로 주임이 되었다. 완도군대에 이 운동이 불길처럼 번져 나가자 급기야 일본 상인들은 영업을 포기하고 목포, 여수 증지로 떠나야만 했다. 이에 일본 경찰은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일본인 관리및 일본인을 배척하도록 선동하였다고 체포되어 11월 18일 장흥법원을 거쳐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소후, 감옥에서 알게된 경북 상주 출신 애국지사 조태형의 권유로 상주군 낙동의 픙양조씨 제각 양진당을 개조하여 조명학교를 열고 4년간 신학문을 가르치며 계급타파와 노동정신의 함양에 노력했다. 당시 개교식에서 '양반의 머리를 해부한다'는 제목의 강연은 유명하다. 하지만 옥에서서 얻은 지병의 재발로 부득이 귀향케 되었고, 귀향 후 1923년 3월 1일 고향 군외면 교인리에 교안사립학교를 오석균(법명 미산)선생과 설립하고 이듬해 교장을 취임하였으니 672명(남540, 여 132)이 졸업하였다. 1927년에는 육지에서 바다를 건너 완도의 교이사립학교를 다니던 해남군 북평면의 학생들을 위해 북평인 서흥리에 동명학원, 이진리에 동광학원을 각각 세웠으나 1934년 3월 1일 일제의 강압에 폐교되었다. 하지만 폐교 직후 그 해 5월 23일 또다시 군외면 벌목리에 영창간이학교를 세워 1943년 5월 31일까지 9년간 운영했다. 그후 군외동공립학교로 변경되었고, 현재의 불목초등학교(폐교)가 되었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소남의 끈질긴 교육운동은 '조국광복을 위함은 오직 후진교육이 선생되어야 한다'는 일념에 의한 것이었고 실제로 정남균, 유치오, 문승수,오문현,황상남, 김홍배 등 많은 제자들이 독립투사로 배출되었다. 1942년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무기를 만들기 위해 명선욱공적철비를 부수어 다른 철과 함께 야적되어 있는 것을 돌이 황자사와 함께 일경의 눈을 피해 가면서 근처 황진리 조카집에 옮겨두고, 선생은 우리나라 역사책과 역대 가리포첨사 기록부를 지니고 불목리 앞 섬인 고마도로 은신하였다. 8.15광복과 동시에 이를 가지고 나와 완도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이처럼 소남 선생은 항일, 교육, 운동을 하며 허례허식과 미신타파, 김 생산볍 개량, 농촌기계화, 산림의 녹화등 농어촌 계몽에도 힘썼고, 민족문화 방면에도 조예가 깊어 일제하의 감시를 피해가며 '청해비사',' 진한국마한사', 고문학갈설, 이독문연구,고어 활용법 등의 저서를 남겼다. 만녕에는 개척정신의 시범을 보이고자 소남 농장을 개척하였고, 함께 교인 사립학교를 세웠던 오석균의 인도로 1958년 76세의 나이에 "이 법대로 하면 자신과 세상이 바뀔 수 있다"며 원불교에 입교하여 불목교당을 창립했으며, 마음공부와 인성교육을 통해 사람을 바꾸고자 소남 농장을 교단에 기증하였으니 월불교 소남훈련원의 기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