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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통과 서양인식. 선생은 퇴계와 한주의 주리론을 계승한 이학자로 자정론을 고수한 유학자이다. 학문에 있어도 특정 학파에 묶이지 않았다. 퇴계학을 계승하면서도 남명학 복원에 앞장서고, 율곡을 공부하면서 동시대의 학인들과 두루 소통하였다. 영남은 물론 호남의 전우나 기정진, 기호의 이항로, 개성출신의 김택영 등과도 교류하였다. 이 때문에 다전이 1919년 3.1운동 당시 전국 유림을 통합하여 파리장서 운동의 산실이 될 수 있었다. 학문의 벽을 허물고 제자들과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만국공법까지 연구한 개방적인 유학자였지만 선생의 서양문명 평가 기준은 유학의 천리(天理)와 인의(仁義)였다. 이는 제자 이인재가 저술한 고대희랍 철학고변에 써준 발문속에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철학 연구서라고 한다. 우리는 장서의 '대명지조, 대화지행'이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구 문명의 성세를 지적한 것으로 여기서 전통 유학의 척사론을 접고 조선 유학을 근대적으로 정리한 다전학풍의 지향을 알 수 있다. 강학당 중건의 의의. 20세기 다전강학당은 조선 유학을 정리하고 유림을 통합하여 민족의 독립운동을 전개한 근대사의 현장이며, 선생께서 망국의 한을 품고 순국한 장소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빈터로 남아있던 그 자리에 2020년 거창군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앞으로 이곳은 거창뿐 아니라 우리나릐 유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미래 세대가 꿈을 다지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리라 믿는다. 이제 심산 김창숙의 신도비명을 빌려 다전강학당 중건의 의의를 되새겨둔다. "선생의 명을 받아 유림장서를 들고 해외로 떠날 때, 이 일은 우리의 도(道)를 세계 각국 대표들에게 크게 알리는 일이다. 네가 이미 이 무거운 짐을 졌으니 힘쓸지어다'라고 격려하셨는데 아직도 그 말씀이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팔십 나이에 쓸모없는 늙인이로 뜻한 바 사업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선생께서 당부하고 기대하신 그 뜻을 저버리고 말았구나. 장차 지하에서 어떻게 선생님을 뵐 수 있겠는가?" 다전 강학 24년간의 영광이 풀속에 묻혔다가 오늘 강학당의 중건으로 되살아니ㅏ 우리 민족사의 영명한 기록으로 길이 전해지길 것이다. 선생 순국 후 지역 유림들이 1920년 산청에 나동서당, 1921년에 거창에 다전서당, 1958년 전남 곡성에 산양재를 세워 선생을 추모하고 있으며 1963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문집 63책, 연보 2책, 문인록 1책이 전한다. 2023년 8월. 한국고전번역웜 이사장 불초손자 곽진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