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page

- 60 - 인계하였다.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 고도 300자루나 되었다. 이때, 영남 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이순신이 체포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 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치계(馳啓)를 올렸지만 허사였다. 이순신이 서울로 압송되자, 지나는 곳곳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성 들이 모여들어 통곡을 하며,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 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1차 신문(訊問) 때 한 달여 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 이 고하였다. 1차 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우의정 정탁(鄭琢)의 적극적 인 변호로 인해 추가적인 신문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도원수 권율(權慄) 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이순신은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천지 에서 나 같은 일을 겪는 수도 있을까.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 고 한탄하면서 잠시 들러 성복(成服)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 쪽으로 향하였다. 그 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 (漆川梁)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이순신이 힘써 길러온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