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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家臣) 와키사카사베에[脇坂左兵衛]·와타나 베[渡邊七右衛門]를 위시하여 이름 있는 자들이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계되었다. 한산대첩 후 이순신은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安骨浦: 창원군 웅천면)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와 합동작전을 하려던 구키[九鬼嘉隆]·가토[加 藤嘉明] 등의 일본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 중이었다. 이순신은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 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 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焚滅)하였다. 제3차 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 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다. 공격 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이억기와 작전회의를 하여 부산포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 상하였다. 9월 1일 오전 몰운대(沒雲臺)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絶影島: 지금 影島)에 이르렀을 때,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절영도에서는 수 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 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草梁) 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