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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 事宜)가 되었는데, 이때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 앙에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 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이순신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 나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主將)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 (添兵)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끝내 자기 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 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 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 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 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 었다.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 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 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 였다. 이 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 렵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 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