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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 강한 정의감은 뒤에 상관과 충돌하여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며, 용감성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서 매양 선두에 나서서 장졸들을 지휘함으로 써 예하장병의 사기를 북돋워 여러 전투에서 전승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 다. 또, 이순신의 인자한 성품은 홀로 계신 노모를 극진히 받들 수 있었 고, 어버이를 일찍 여읜 조카들을 친아들같이 사랑할 수 있었다. 이순신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 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 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 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 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꺼려 감히 이순신의 문 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發身)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 이 글씨를 잘 썼다.”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訓鍊院別 科)에 응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 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 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 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 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 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