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page

- 39 - 저항하는 불굴의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내가 전사라고 한 것은 꼭 무기를 들고 거리에 나서거나 산에 들어간다는 뜻만은 아니다.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의 형태에 관계없이 전사인 것이다.”(산문 ‘나는 이 렇게 쓴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어느새 하나의 전설이 돼 있었다. 그가 감옥에 서 우유곽에 못으로 긁어 쓴 시가 한편 두편 밖으로 흘러나왔고, 대학생들 은 그의 시를 의식화 교재에 삽입해서 읽었으며, 노래패는 그의 시를 노래 로 만들어냈다. 안치환이 부른 ‘노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자유’는 특히 유명하다.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 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 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을 눈물을 나워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 랴/ 사람들은 맨날/ 밖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 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시 ‘자유’) 88년 12월21일, 그는 9년 3개월여 만에 옥문을 나설 수 있었다. 그후 그는 여기저기 초청을 받아 다니면서 시를 읊고 강연을 했다. 그의 시 낭 송은 성내운의 그것과 더불어 당대 최고라는 평을 받기에 조금도 모자람 이 없었다. 젊은 문인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그를 대개 처음 보는 셈이었 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그를 만나본 뒤에는 마치 10년은 가깝게 지낸 것 처럼 생각했다. “내가 김남주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92~93년 무렵이다. 서울 인사동 의 어느 술집에서였다.… 후배들이 술 마시고 떠들던 모습을 한량없는 그 윽한 눈길로 바라보던 기억. 한없이 푸근한 눈빛의 기억. 그 눈빛은 남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