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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싹싹 핥아 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의 싸움은 허리가 되었다 당 신의/ 배꼽에서 구부러졌다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겠노라 당신 의/ 발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의/ 양심 나의 싸움은 미궁(迷宮)이 되어/ 심연으로 떨어졌다 삽살개가 되라면/ 기꺼이 삽살개가 되어 당신의/ 손이 되어 발가락이 되어 혀가 되어/ 삽살개 삼천만 마리의 충성으로/ 쓰다듬 어 주고 비벼 주고 핥아 주겠노라/ 더 이상 나의 육신을 학대 말라고/ 하 찮은 것이지만 육신은 나의/ 유일(唯一)의 확실성(確實性)이라고 나는/ 혓 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손발을 비볐다 나는”(시 ‘진혼가’) 김남주는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8개월 만에 석방됐다. 74년 김남주는 계 간 창작과비평에 시 ‘진혼가’ 등 7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의 시를 뽑 은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김남주의 시가 “칠흑 같은 어둡고 깊은 밤중의 잠 속에 빠져 있는 혼수 상태의 문단에 칼을 들이대는 섬뜩함으로 다가온 다”고 평했다. 그러나 결코 문단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의 문학은 곧 싸움이었다. 75년 에 김남주는 전남대 앞에 ‘카프카’라는 사회과학 전문서점을 냈다. 그곳은 광주 운동권의 총 집결지이자 문화 사랑방이었다. 77년에는 고향에서 해 남농민회를 결성했고, 광주에서 황석영·최권행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를 열기도 했다. 그후 상경해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 전위대 ‘전사’로 활동한다. 79년 구속돼 이후 길고 긴 투옥생활을 시작한다. 감옥 에서 그는 무수한 책을 읽고 생각하고 또 썼다. “나는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며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하고 있는 근로대중들의 생활과 투쟁을 그린 문학작품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읽어봤다. 이런 작품을 쓴 사람들 중에서 특히 내가 동지적인 애정을 가지 고 관심을 기울였던 시인들은 하이네, 브레히트, 아라공, 마야코프스키, 네 루다 등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나에게 준 위대한 교훈은 인류에게 유익하고 감동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작가 자신이 진실된 삶을 살아 야 하고, 자기 시대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착취와 억압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