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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 었으되/ 그것은 보리 서말에 얹혀 떠맡긴 주인집 딸이었다”(시 ‘아버지’) 김남주는 공부를 잘했다. 그는 해남중학교를 나와 그해 유일하게 광주의 명문 광주일고에 들어간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어서 어서 커 서/ 면서기 군서기가 되어주기를 바랬다/ 손에 흙 안 묻히고 뺑돌이 의자 에 앉아/ 펜대만 까닥까닥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랬다/ 그는 금 판사가 되면 돈을 갈퀴질한다고 늘 부러워했다/ 금판사가 아니라 검판사 라고 내가 고쳐 말해주면/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금판사가 되면 골방에 금싸라기가 그득그득 쌓인다고 했다”(‘아버지’) 김남주는 아버지의 그런 기대를 저버린 불효자였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 반발, 스스로 학교를 그만둔다. 그는 검정고시를 거쳐 몇년 후인 69년 전남대 영문과에 들어갔다. 당시 정국은 박정희가 3 선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있어 매우 어수선했다. 동생 김덕종 의 기억에 따르면 한번은 형이 눈덩이가 시커멓게 된 채로 집으로 내려온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교련 반대시위에 참가했다가 최루탄에 맞아서 그 렇게 된 것이었다. 그때 이미 그의 길은 정해진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 길로 거침없이 달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 글자 모른 사람들은 술이라도 몰래 해묵고 살 것디냐. 못 배 운 집 나락은 어디 일등 수매해가더냐. 삼등 아니면 등외다”(산문 ‘나는 왜 남민전에 참가했는가’)라고 늘 신세타령을 하던 아버지의, 그리고 아버 지와 같은 민중의 삶 속으로 한 걸음 깊숙이 들어가는 길이었다. 72년 가을 그는 복학생 이강과 더불어 동학혁명 전적지를 탐방했다. 그 리고 얼마 후 둘은 유신 반대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배포했다. 결국 그들 은 반공법상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 혐의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 수사 를 받았다.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 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