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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이 후퇴하던 시기에도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해남내무서에 감금되 었던 주민들이 1950년 9월 29일 우슬재, 금강곡 골짜기에서 집단희생되었다. <경찰토벌 피해> 인민군 후퇴 후 해남에 진입한 해남경찰서와 산하 각 지서는 지역 사정 도 알지 못한 채 부역자 색출과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주민들 피해가 극심했다. 10월 14일 해남 계곡면 장소리 신봉만 등 주민 9명이 강진으로 가던 중 해남 계곡면과 강진군 성전면⃉경계인 연계재 경계에서 강진경찰서 소속 경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8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1명이 살아남았다.₹ 생존자는 희생사실을 마을에 알렸다. 해남에서는 10월 20일 해남경찰이 대한청년단, 의용소방대와 함께 산이 면 상공리에 총을 쏘면서 진입하였다. 이에 겁을 먹은 상공리 마을 주민들 일부가 이들을 피해 도망하게 되었고 경찰은 이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 했다. 이 과정에서 상공리 오유록 등이 마을 주민 7~8명이 이웃 주민의 사랑방에 모여 있던 중 학살당했다. 해남경찰서는 연행한 해남읍 구교리 주민 80여 명을 11월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삼산면 신금리 방오리산 방공호 등에서 총살했다. 계곡면에서는 1950년 11월 9일부터 1951년 1월 15일까지 집단희생사건 이 발생했다. ‘방춘리’는 국군 수복 직후 1950년 11월 9일경 경찰에 의해 집들이 모두 불에 태워졌다. 주민들이 거처할 곳을 찾아다니는 동안 1951년 1월 7일 경찰에게 20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