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page

2023년5월31일 수요일 6 (제197호) 관향조 종친회 밀양박씨 규정공파 파조 고려 사 헌부규정 휘 현(鉉),아드님 좌랑공 휘 문유(文有) 시향이 지난 달 26일 (음3.7) 전북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봉서재 옆 단소(壇所)에서 봉행되 었다. 이날 제향은 용정(참판공 后) 집 례관의창홀에따라각헌관이헌작 하며봉행되었으며,이어장소를옮 겨 전서공(典書公) 휘 침( )의 배 위 정경부인(貞敬夫人) 밀산박씨 (密山朴氏), 현풍곽씨의 제향이 묘 소에서봉행되었다. ▶제관분정록참조 봉서재(鳳棲齋)는 밀양박씨 규 정공파 전서공종중의 재실(齋室) 로서 200여만 성손의 요람(搖籃)이 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삼문인 정상 문(呈祥門)을 들어서면 우측에 전 통한옥4칸팔짝지붕의구재(舊齋) 와 한옥형식을 갖춘 콘크리트구조 7칸 팔짝 지붕의 본재(本齋·新齋) 와 동·서재(東·西齋)가 한 눈에 들 어온다. 봉서재 최초건립은 아쉽게도 자 료가 남아있지 않아 후손 원종(遠 鍾) 公이 지은 ‘선조비 정경부인 밀 산박씨산소변혁사실기’를근거로 유추해볼수있다. 이에따르면뷺븣이렇게하여드디 어1840년(헌종6년경자)에정경부 인의 묘소를 개봉축하고 석물을 세 워새롭게단장한후산소를관리하 게 되었으며,얼마 후 재각(齋閣)을 세우고 위토(位土)를 장만하여 대 대로수호할수있는규모로갖추게 된 것이다.뷻라고 기록하고 있어 184 0년이후로보아야할것이다. 봉서재는 수차례 중수를 거쳤으 나 화재로 전소되었다는 기록이 있 다.그리고본재에걸려있는화산권 용현 선생이 지은 봉서재기 신재 (鳳棲齋記 新齋)에도 구재(舊齋) 자리에 지었다는 기록과 함께 임술 년 국추(壬戌年 菊秋)라고 되어 있 어 화재로 전소되어 1922년 음력 9 월에 새롭게 지었다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건물은 1922년 건립되었을 유추해볼수있다. 이후 1964년과 1978년 대대적인 중수에이어수시로보수를거쳤고, 지금의 본재는 1981년에 건립되어 지금에이르고있다. 전서공의 휘는 침으로 규정공(휘 鉉)의증손자다. 아버지 상장군 휘 사경(思敬)은 고려 전법판사 겸 상장군을 지냈으 며,어머니정경부인전주이씨는수 선(守善) 公의 따님으로 공(公)께 서는 1342년(壬午)는 충혜왕(忠惠 王)3년에태어났다. 고려조에서 전의판사, 호조전서 를 지냈으며고려조 말1392년조선 국을 개국하자 이씨왕조(李氏王 朝) 섬기기를 부끄럽게 여기고 고 려조의 명신재상과 더불어 망국의 한(恨)과슬픔을간직한채송도(松 都,지금의개성,고려의 수도)를떠 나 만수산(현 개풍군 광덕산) 부조 현(不朝峴, 두문동 72현이 만수산 으로들어갈때이곳에다의관을벗 어걸어놓고넘어갔던고개라하여 지어진 이름)에 올라 의관(衣冠)을 벗어 걸어놓고 두문동(杜門洞)으 로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지켰다. 제관록(초헌/아헌/종헌/집례/대 축 순)△규정공 단(壇) 용순(숙민 공후),상일(문도공후),종호(문도 공 후), 종식(숙민공), 충기(문도공 후) △좌랑공 단(壇) 창규(숙민공 후), 운룡(문도공 후), 명규(규정공 후), 종식(숙민공 후), 병년(숙민공 후) △전서공 상용(문도공 후), 태 강(김제공후),종영(부정공후),종 식(숙민공후),병년(숙민공후)-이 상- 밀양박씨규정공파봉서재시향봉행 규정공제관(좌)과좌랑공제관(우)이한자리에모여기념촬영을하고있다.(가운데를중심으 로초/아/종/축관순) 규정공·좌랑공·전서공등 1455년 세조의 왕위 찬탈시 생육 신의 한사람인 김시습 외 8현이 김 화현 남면 육단리 어둔산에 초막을 짓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구은의사(九隱義士) 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추모제향이 음력3월상정일인지난4월29일강 원도 철원군 호국로 7003-23 (근남 면)의 구은사에서 지역 유림주관으 로봉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철원군 박경우(朴慶 祐) 부군수가 초헌관으로 분향과 강신 헌폐에 이어 첫잔을 올리고, 김태룡(金泰龍) 유학자의 독축, 김 현모(金顯模) 철원군 문화원장, 박 용옥(朴用玉) 영해박씨 후손이 두 번째와세번째잔을올렸다. 조선시대 단종복위를 도모한 시 조 관설당의 40세(世) 도(渡)와 아 들 인손(璘孫), 계손(季孫)과, 아우 제(濟), 형인 랑(浪)의 아들인 손 (奎孫),효손(孝孫),천손(千孫),매 월당 김시습(金時習), 정재 조상치 (曺尙治)를합하여구은(九隱)이라 하며,이들의절의를숭상하기위해 1818년(순조18)에영해박씨후손들 과관내사림의발의로건립되었다. 불사이군의 마음으로 초막동에 내려와 은거하며 단종의 복위를 도 모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지 3백5 0여 년만이다. 그러나 1864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에 의해 철거 되었다가 고종3년(1894년)에 이 터 에 설단(設壇)하여 구현(九賢)을 다시 배향하고, 1921년 중건되었으 나 한국전쟁의 와중에 사우가 완전 소실되어 제향이 중지되다가 1960 년 박규손의 15대손 박재민의 발의 로 초막동에서 김화군수의 초헌으 로노천봉행(露天奉行)되었다. 이후 1971년 가 사우(假 祠宇)를 부설하고 제례를 이어 오다 1977년 영해 박씨 후손과 사림제현(士林諸 賢)의 찬조로 신 사우(新 祠宇)를 중건하고 9월의 상정일(上丁日)에 준공 및 추계제향(秋季祭享)을 올 렸다. 구은사 제향은 매년 음력 3월 과9월상정일에봉행된다. 2016년 철월군 향토문화유산 제1 호로 지정되어 2017년 사우 기단을 철거하고 재설치 및 내외부 방충공 사,내삼문신축,석축,담장및포장 공사등정비공사를통해새롭게선 보였다. 한편 상왕 단종의 자규사에 차운 하여지은돈수공박도선생의자규 사에는 구구절절 단종을 그리워함 이배어있어소개해본다. 자규(子規, 소쩍새)가 우네 자규 가 우네/ 목메어 슬피슬피 무엇을 하소연할까?/불여귀 불여귀(不如 歸, 두견새의 별명)라 하네/ 파협 (巴峽)을 가려해도 가지 못해 우노 라네/ 산은 비고 날은 저문 밤에 왜 그리 꽃 사이에 피를 뿌리며 애원 (哀寃)을 토할까?/ 가지에서 가지 로 잎에서 잎으로 애끊는 소리소리 븣 ./ 서(西)도 아닌 동(東)도 아닌 북(北)쪽만을 바라보며븣./ 슬픔이 올 때 그 소리 들으면 눈물 금 할길 없네/초혼조(楚魂鳥)동청수(冬靑 樹, 사철나무)와 한(恨)이 같다고 천고에 헤아려 왔다네.주(註)초혼 조(楚魂鳥)-초나라 회왕이 진나라 에 갇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 원조가되었다고함. 돈수공은 신라만고충신 관설당 (휘 제상)의 40세(世)이다. 평양서 윤박창령(朴昌齡)의차남으로1396 년에 태어나 세종 때에 사복정(司 僕正)에 이르렀다. 형(兄)·제(弟)· 자(子)·질(姪)이 모두 귀(貴)하게 되었으나 공의 성품이 본디 견고하 고 확실하여 소박하고 청빈하여 벼 슬에 나가기를 싫어한지 오래되었 다.1455년에이르러여러아들과모 든조카들이모두처음에는김화초 막동에 들어가 매월당 김시습과 정 재 조상치와 함께 은둔하였다가 공 은 지형(地形)이 얕아 오래 머무를 수없다하여처자와함께멀리문천 운림산(文天 雲林山)에 들어가 숭 질(崇質)이란 옛 호를 돈수(遯 쑴 ) 라고 고쳤으며, 산수(山水)의 즐거 움에편벽(偏僻)되어문망(聞望)이 없이 수년 동안 있다가1459년향년 64세로일기를마치었다. 단종절신구은의사(九隱義士)충절기려 강원철원구은사 구은사춘향이지난달29일봉행된가운데지역유림과제관이함께하고있다.사진가운데 금관조복을입은제관왼쪽부터박경우,김태룡,박용옥順 세조에 의해 원통하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과 정순왕후,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원사(寃死)한 황보인,김종서,정분삼상(三相),안평·금성대군 등 종실(宗室), 그리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참형을 당한 사육신(死六臣),그 외 죽 음을 당한 수많은 원혼을 달래기 위한 추모제례 가 지난 4일 공주 숙모전(충남문화재자료 67호) 과동계사에서있었다. 이날제향은이영진(李永珍)집례관의창홀에 따라정백교(鄭白敎)숙모전이사장이초헌관을 맡아 헌작하고 이어 영해박씨대종회 박병준 부 회장(前지마왕릉참봉),팀61박제근(朴濟根,야 구선수박찬호父)명예회장이아헌관,종헌관을 맡아 헌작하였고, 이지화(李枝華) 축관의 독축 으로50여분에걸쳐진행되었다. 숙모전은 1457년에 세조가 속리산을 거쳐 동 학사에 들렀다가 초혼단을 보고 감동하여 팔폭 비단에원적(寃籍)이란제목으로억울하게죽어 간 명단을 적어 유불(儒佛)이 공사(共祀)토록하 고사패(賜牌)하였다. 단종이 돌아가신 후에 김시습,조상치 등 향사 7신이 엄홍도와 만나 육신단위에 일단(一壇)을 만들어 왕을 초혼 제사하였고, 1904년(광무8)에 숙모전이라사액하였다. 동무(東 밴 )에는 안평대군을비롯한48위와 합 독에 122位를 서무(西밴 )에는 문민공 박중림을 비롯한48위와합독에123위를배향했다. 349위의 충혼(忠魂) 의백(義魄) 중 박씨 선조 는 관설당 박제상(동계사)을 비롯하여 숙모전 서무에 문민공 박중림(文愍公 朴仲林), 충강공 박쟁(忠剛公 朴켰 ), 충정공 박팽년(忠正公 朴彭 年),충정공박심문(忠貞公朴審問),교리박인년 (敎理 朴引年), 검열 박영년(檢閱 朴永年), 임회 당 박희권(臨淮堂 朴希權), 절도사 박대손(節度 使朴大孫),문경공박충원(文景公朴忠元),수찬 박기년(修撰 朴耆年), 집현전 박사 박대년(集賢 殿博士 朴大年), 국당공 박흥생(菊堂公 朴興生) 등13위이다.이중문민공박중림,충정공박팽년, 교리 박인년, 검열 박영년, 수찬 박기년, 집현전 박사박대년은부자지간이다. 이날 숙모전 제향 후에는 숙모전·삼은각 동편 에 있는 동계사에서 신라 제19대 눌지왕 때에 일 본에 인질로 잡혀간 왕의 아우 마사흔을 구출하 고 왜지에서 순절한 관설당 박제상 선행의 충혼 을달래는제 향이이어졌다. 한편 이날 제향에 참례한 64성씨 400여명의 참 례자 중 합독으로 모셔진 후손들은 아쉬움을 달 랜다.계유정란의 연좌에 화를 피하지 못하고 목 숨을 잃은 선현들은 죽어서도 초라하다.이에 후 손들은조금더편하게흠향할수있었음하는바 람이다. 븮비운의임금븯단종추모제향봉행 공주숙모전븣349위의충혼(忠魂)의백(義魄)함께기려 숙모전제관왼쪽부터정백교초헌관,박병준아헌관,박 제근종헌관順 오직 나라를 위해서는 충성심이 불같았고 집 안을 위해서는 모든 식솔들과 여러 제종(諸宗) 들과 많은 가동(머슴,하인)들에게 자애로운 어 버이였고, 전투에서는 용감한 장수로서 싸움에 서한번도패배한적이없는삼우정박경신선생 과 두 아드님 계애공(휘 지남)·운애공(휘 철남) 의 충의정신을 기리는 제향이 지난 1일 경북 청 도군 금천면 임당리 임호서원 경의사에서 지역 유림주관으로 박종홍 前 지마왕을 참봉이 집례 를 맡아 차분하고 질서정연하게 진행한 가운데 윤상목 원장의 초헌례에 이어 최동한,김병희 유 학자의 아헌과 종헌,그리고 이승율 축관의 독축 으로30여분에걸쳐엄숙봉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오전 9시30분 유림들과 본손들이 임호서원 강당에 모여 개좌를 열어 제관을 분정 하여 오전 10시 30분 경의사로 이동하여 제례를 봉행하고 이후 강당에서 헌작과 음복 강평에 이 어파자하였다. 윤상목 원장은 이날 강평에서 삼우정 박선생 을 비롯 성현들의 향사에 참여 해주어 감사하다 고 말하고 삼우정 선생을 비롯한 성현의 음덕과 유풍을 본받아 길이길이 계승하고 발전시켜 선 비정신이 존속되어 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 고말했다. 박경신선생의휘는경신(慶新)자(字)는중선 (仲宣), 호는 삼우정(三友亭)이다. 1570년 무과 복시에 급제하고, 1573년 35세에 무과전시(武科 殿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함으로서 적순부위 훈 련원참군에제수되었다. 1589년선생의나이51세에건공장군훈련원부 정에 승진하였다.1592년(임진)2월에 선생은 경 북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의 고향집에 가서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있던 중 4월 별안간에 왜놈의 침입으로 부산포가 함락되는 등 온 나라가 급격 한 소용돌이에 빠져 곧바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 을 토벌했을 뿐만 아니라 선조 임금의 피난길을 호위하였다. 선생은밀양도호부사겸청도조전장으로많은 전투에서 승전하면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 청 도를 온전하게 지켰으나 1594년 6월 5일 밀양관 아에서 피로 누적으로 순직 안타까움을 자아냈 다. 선생에게 내려진 임란 1등 공신 녹훈과 포상 문서인 절지수 등이 1996년 1월 19일 정부로부터 문화재보물제1237호로지정되었으며1816년가 선대부병조참판에증직되었다. 선생의두아들계애공휘지남과운애공휘철 남은 아버지 삼우정 선생을 따라 의병으로 참전 하여많은전공을세워각각선무원종공신2등에 녹훈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창의와 전투의 과 정을 기록하는 창의일록을 남겨 임란사 연구에 큰보탬이되고있다. 밀양도호부사겸청도조전장박경신선생과두아 들충의정신기려 임호서원경의사븣지역유림주관 임란의병장삼우정박경신선생3부자의충절을기리는제향이지난1일임호서운경의사에서지역유림주관으로봉행되었 다.(사진앞줄왼쪽부터윤상목,최동한,김병희,박종홍,이승율,박순복유사順) 광해10년(1618년) 戊午年 23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인조개옥(仁祖改玉)에 참여하여 정사원종공신(靖社源從功臣), 이괄(李适) 의 난에 진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고 노년 에병자호란을당해의병을일으켰던무은공 박세중장군의제361주기추모제향이지난1 0일 전북남원시대강면 풍산리곡촌마을소 재 부조묘풍양사에서 좌상공파대종회 상섭 총무의집례로 용식,윤근,두석현종이차례 대로 헌작하고 화석 전 회장이 독축하였으 며,태수,순표현종이좌우집사를맡았다. 풍양사는장군의위패를모신사당으로숙 종8년(1682년) 壬戌年에 命 부조묘지전(不 튐 廟之典-조묘:원조를 합사하는 사당)하여 1686년 을축년에 전북 남원시 대강면 풍산 2 61-3번지에 풍양사를 건립하고 1904년 을사 년에대중수하고,이후에도지자체예산으로 수차례에걸쳐보수하여지금에이르고2000 년 6월 23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풍양사) 제155호로지정되었다. 무은공은 선조 23년(乙未1595년)휘 검종 (儉宗-贈職戶曹參判)과김해김씨의장남으 로남원부갈치방황죽리(현남원리월락동) 에서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무용(武勇)이 뛰어 나 광해10년(1618년) 戊午年 23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인조6년(1628년) 무진년 6월25일 어모장군 행 훈련원 부정, 등 주요관직을 걸 쳐 인조 13년(16 35년) 乙亥年 12 월 25일 가선대 부 행 호 분 위 부 사맹겸 내금위 장을 역임하였 다. 인조 14년(16 36년) 병자호란 시 왕명을 받아 승지 최온과 같 이 호남에서 의 병을 일으켜 상 경하니 주화파 ( 主 和 派 ) 들 의 건의로 강화(講 和)되었다는 소 식을 듣고 통곡 하며 시를 짓기 를 偸生非是 男 兒事(투생비시 남아사-억지로 살고자하는 것이 사내가 할 일이 아니다)愧恨不從 三學 士(괴한부종 삼학사-삼학사를 따라죽지 아 니함이 부끄럽구나)하시었다. (삼학사는 : 尹集·吳達濟·洪翼漢 병자호란시 순절한 자). 이날 곧 남쪽 산동(山洞) 고향(故鄕)으로 돌아와서 호를 무은(霧隱)이라 하고 은사 (隱士)로처세하며매 양식탁을물려내고비 탄(悲嘆)하며 분통(憤痛)하여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로대 주상(主上)께서 욕 (辱)을 보시되 신하(臣下)가 죽음으로 갚지 못하니 머리가 오히려 하늘을 받자올 수 있 는가하였다. 향년(享年) 68세가 되던 임인년(壬寅年,1 662)에졸(卒)였다. 무은공박세중장군제361주기추모제 향봉행 뱚뱚뱚뱚뱚뱚뱛뱚부조묘‘풍양사(楓陽祠)’병자호란에삼학사를따르지못함을 뱚뱚뱚뱚뱚뱚뱚부끄러워하며무은(霧隱)이라자호하고은사(隱士)로처세 풍양사제관,사진앞줄오른쪽부터용식초헌관,윤근아헌관,두석종헌관,화석축관순 (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