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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5월31일 수요일 12 (제197호) 기획 충북영동군매곡면노천리는충주박씨종중세거지로도유형문화재인‘흥학당(제152호)’과‘사로당(제151호)’,‘봉유 재(제402호)가있으며,인접마을내 오곡은국가보물‘세천재’가있어서당,사당,재실을모두갖춘종중의지역정착과발전과정을보여주는전형적인 마을이다.이마을은1470년영동현 감박원식선생의넷째아들박지(朴址)께서노천리내동마을견계달(甄季達)의집안에장가들면서정착한이후임진 왜란에위기에처한나라를구하기 위해의병을일으켰던박이룡(朴以龍)장군과호랑이도감복한효자오촌박응훈선생등충효의가문으로550여년 이어오면서지역의토반으로서그 책임과의무를다하며지역의유풍과학풍을일으킨전형적인양반가이다.특히한가문의재사가모두도지정문화 재또는국가보물로지정관리되고 있는것또한드문일이기에문화재를중심으로집성촌을함께소개해본다. 충북영동군매곡면노천리내동마을전경,장사랑공께서1470년입향세세손손이어져온충부박씨집성촌이다. 흥학당은 충주 박씨 종중에서 후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위해지은서당으로많은인재를배출하였 다. 선영 아래에 지었기 때문에 자손들의 작업장으 로, 묘소에 향사할 때 재실의 역할로도 사용되었다. 중종 15년(1520)에 입향조 박지 선생이 아들 사형제 (성량·성간·성건·성권)가 당시 황간현감 박영(朴 英:1471∼1540) 선생에게 배울 때 선생의 지시에 의 해처음지었다.숙종35년(1709)과,영조11년(1735), 고종 6년(1869)에 각각 중수하였다. 정면4칸 측면2 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오량집으로 활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남향하여 있다. 덤벙주 초석을 놓고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위의 공포를 초포를 초익공 양식으로짜고안쪽으로는보아지를둘출시켜대들 보의 안쪽을 받쳤는데 특히 대청의 중간 기둥위에 용두를 결구하였다. 중앙2칸은 우물마루[짧은 널을 세로로놓고긴널을가로로놓아우물정(井)자모양 으로 짠 마루]로 깔아 넓은 대청으로 이용하고 양끝 방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가구는 전후 평주위에 대들보를건형식이며동자주위에도주두가짜여져 있다. 『흥학당기(興學堂記)』와 중수기(重修記) 등 이전하고있다.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선영(先塋) 아래에 제각 (祭閣)을 짓고 거개(擧皆, 대부분) 추원(追遠)이나 영모(永慕)라는 뜻으로 당호(堂號)를 부치는데 이 당(堂)의이름을흥학(興學)이라고한것은어떤까 닭인고?대개사람이 배우지않으면사람 노릇을할 수 없는 것이니 배우지 않고 어찌 삼강오상(三綱五 常)의법을알며조상을받들고후손을넉넉히해(奉 先裕後) 주는 의도를 알 수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공자(孔子)가 말씀하시되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 겁지 아니한가?』하시고 또 『나도 태어날 때부터 안 것이 아니고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았다』고 하셨거 든하물며우리중인(衆人,여러사람)들이야! 이렇기 때문에 창려씨(昌黎氏, 韓文公)는 『배우 지 않으면 소와 말에 옷을 입힌 것과 같다고까지 하 였으니 그러면 어찌 사람으로서 배우지 않을 수 있 겠는가?』 삼가 가장(家狀)을 살펴보니 목사공(牧使公, 휘 성량)·소촌공(邵村公, 휘 성건)·생원공(生員公, 휘 성권)삼형제가이곳이당(堂)을건축하여1은도학 (道學)을 강론하는 장소로 하고 1은 후손들의 공부 하는 곳으로 하고 1은 선조 시향(時享)재숙하는 곳 으로 한 것이라 한다.그 연대를 살펴보니 중종 경진 (庚辰, 1520)인즉 지금에 4백년이 가까운데 그 후손 학촌(鶴村), 오촌(梧村), 안정(安定), 일석(一石), 농와(壟窩)등여러선조와향중(鄕中)선비들이이 당(堂)에서 도의(道義)를 강론하여 후진(後進)을 계도(啓導)하는 것으로 책임을 삼았으니 그러면 우 리 선조께서 봉선유후(奉先裕後)의 원대(遠大)한 깊은생각이어찌깊고크지않겠는가?그뒤에역대 (歷代) 명조(名祖)들이 대를 이었으니 후손이 이어 수리하는 것은 이치에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여러 차례창상(滄桑,상전벽해)을지나기송(杞宋)과같 이고증할수없어한스러웠는데지난을축(乙丑,18 65)년7월에모진풍우로졸연히붕괴되었는데상량 문 두 장이 옛 들보 사이에서 노출되었으니 하나는 숙종기축(己丑,1709)년중수할때족조(族祖)사구 (思九)씨가지은것이고하나는영조을묘(乙卯,17 35)년중수할때족조중매(重梅)씨가지은것이다. 이무렵종재(宗財)가결핍되어거족적협의하에 대종중 이하 사파(四派)에 각 오대(五代) 제수(祭 需)를 반감(半減)하고 자손들도 모두 성금을 내어 수년간 길거(拮据,쉴 틈 없이 바쁘게 일함)하여 기 공한지 두 달 만에 준공하였는데,제도는 옛 모양으 로, 제목은 옛것을 잉용(仍用)하되 상한 것은 새것 으로보충하여옛현판을매다니미안(楣顔)이채색 을더하고천석(川石)이태도를바친다. 당시 선조들의 강도(講道)하던 거동과 현송(絃 誦)하던 동작을 완연히 다시 보는 듯하고 춘추향사 때에 슬픈 마음이 스스로 나타남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시(詩)에 이르되 그 덕(德)을 닦아 선조를 더럽히지말라고하였으니이당(堂)은학문을닦아 도덕에 들어가는 문(門)이라 어찌 다만 선영 향사 때 에 재숙(齋宿)에만 그치겠는가? 그런데 배우는 책 임은 자제(子弟)에게 있고 흥기(興起)하는 책임은 부형(父兄)에게 있으니 부형은 흥기하고 자제들은 학문을 익혀 대대로 서로 지켜 집안의 명성을 떨어 뜨리지않으면이당(堂)이명실상부할것이니오직 원하옵건대모든종원들은선조께서자손위하는마 음을근본삼아대대로폐하지말고수리하면기필코 이당(堂)이천지(天地)로더불어영원할것이니각 자삼가힘쓸지어다. △박성량(朴成樑) 청렴 강직하여 녹봉(祿俸)외에는 취하지 않으니 청백함이 명성을 떨친 강릉공(휘 효함)의 증손자다 강릉공의 호는 청간재(廳澗齋)이다. 세종 경술년(1 430) 가을 보령에 해구(海寇)가 침입하여 걱정거리 임에도 적임자가 없었으나 청백함으로 선발되어 부 임즉시 순찰사 최윤덕과 감사 박안신(밀양인 규정 공 后)으로 더불어 함께 성 동쪽 일리(一里) 지점 당 산(唐山) 남쪽을 살펴 면밀한 계획으로 몇 달 되지 않아 축성을 마치니 백성이 별로 힘들이지 않고 도 적이 자취를 감췄다. 얼마 되지 않아 첨추(僉樞)가 되었고 또 얼마 후 나아가서 강릉대도호부사(江陵 大都護府使)가 되었다. 조부는 사헌부 감찰과 영동 현감을 역임한 휘 원직(原直)이고 아버지는 장사랑 공 휘 지(址)이고 어머니는 황간견씨이다. 사형제 중넷째로안주목사를지냈다. 어려서송당박영선생(규정공后)에게배워경사 (經史)에 통달하였고, 필법(筆法)이 힘 있고 사예 (射藝,활쏘기)가신묘하였다.일찍이사마시에합격 하였고 24세에 무과에 올라 선전관 겸 내승을 제수 하였고,만기가되어충주판관에제수되었는데그때 나이 26세이다.여러 차례 옮겨 훈련원 도정,종성부 사,안주목사에이르렀다.졸년은42세이다. △박성간(朴成杆) 안주목사박성량의아우이다.아들응의(應義)·응 도(應道)에 이르러 무후(无后)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박성건(朴成建) 자(字)는 사예(士預), 호는 소촌(邵村) 사마시에 오르고 문과에 급제하여 전력부위,옥천군수,영천부 사,청주목사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송당 선생에게배워학식이매우높고글짓는솜씨가뛰어 났으나운이좋지않았다.고을사람들이모두충신수 복(忠信壽福)이라일컬었다.향수(享壽)92세이다. △박성권(朴成權) 진사시에 올라 성균생원이다.송당 선생에게수학 (受學)하여재주와행실이뛰어나고문사(文辭)가섬 세하며 율기정가(律己正家, 궁실을 낮게 짓고 거친 음식을먹는의리)에성현(聖賢)으로모범을보였다. 내 외자손이문무(文武)로많이현창(顯彰)하였다. 봉유재는 중종 때 안주목사를 지낸 박성량(朴成 樑)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632년 건립하였다. 이 후 두 차례에 걸친 중수 과정을 거쳤으며 2019년에 전체해체보수하였다.흥학당인접한곳에건립되어 소종재라 불리다가 봉유재(奉裕齋, 선조를 받들고 후손에 복을 준다는 奉先裕后라는 뜻)라는 현판을 달고 재실, 서당으로 사용하였다.봉유재는 주변을 토석담으로 두르고 전면으로 삼문을 배치하였으나, 후대에 복원된 것으로 초축 당시의 양상은 알 수 없 다.건물은 정면 4칸,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 로저연석기단과초석을사용하였으며용도는과거 서당용도였으나현재는재실용도로사용하고있다. 2019년 해체보수과정에서 확인한 결과 구들은 지형 적 특성을 고려 비스듬하게 시공되어 있었고, 일부 목부재의 경우 다른 건물 부재를 재사용한 흔적이 다수확인되었다.또한주요목부재가수리과정에건 물 상황에 맞게 다양하게 변화 적응하는 양상을 보 였으며, 낮게 시공된 굴뚝과 연도 등 지역적 특성을 잘보여주고있다. 사로당은 충주 박씨 박수근(朴守謹)의 4형제가 나이80이되도록학문을익히던서당이다.따라서4 명의 노인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사로당’이라 하였 다 한다.아우들은 수인(守認),수해(守諧),수원(守 源)이다.숙종 35년(1710)에 처음 지었다. 영조 43년 (1767)에중수하였고,여러차례중수하여오늘의모 습을 갖추었다.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평지 에 남향하여 자리 잡은 이 건물은 ○자형 평면을 이 루고 있는데, 중앙 어칸과 우측 협칸 전면은 우물마 루를 깔았고 좌측 협칸과 우측 협칸 뒷면은 온돌방 을 드렸으며,남쪽과 동·서쪽으로 면하여 간결한 난 간을돌렸다. 자연석기단위에덤벙주초석을놓고세운기둥은 마루 아래 위를 다른 부재로 세웠는데 굵은 아래 기 둥1.5m높이에귀틀을 짠후마루를놓았고 이귀틀 위에 다시 상부기둥을 세운 고상식(高床式)의 형태 로상부기둥에는약간의배흘림이되어있다. 건축양식은 초익공(初翼工)계통이나, 익공 끝을 뿌리로 만들지 않고 앞을 장방형으로 잘라놓았다. 지붕틀은 5량가구로서 종량(宗樑)을 받고 있는 동 자기둥[童子柱] 상부에 간결한 포를 구성하였고, 또 종량 위에는 제형대공을 세워 종도리와 함께 지 붕무게를받쳤다. 특히 중앙칸 기둥 사이에 위로 많이 휜 우미량(牛 尾樑:동자기둥을받는보)을걸쳐놓아장식을하였 다.두리기둥을세우고초익공계통으로꾸민건물로 가구의 구성에도 정성을 비교적 많이 들인 격식을 갖춘별당건축이다. 황간(黃澗) 고을 남쪽 10리 마을은 오곡(梧谷)이 요 집은 사로(四老)이니 옛적 현감 박공 휘 수근 (守謹)이 공부하던 곳이다. 박공은 문학(文學)으 로 유명하고 효우(孝友)의 칭송이 있었다. 형제 네 분 이 모 두 8 0 세 가 되 었 는 데 낮 이 면 한 방 에 서 기거하고 밤이면 배개를 나란히 하여늙도록 게을 리 하지 않으니 사로당(四老堂)이라 이름 한 것이 이 때문이다. 몇십 년 뒤 에 그 의 후 손 중 권 (重權)이 자 금 을 모 아 중수하고 나에게 와서 기문(記文)을 청하거늘 내가 그의 성의에 감동하여 사양치 않고 말하기를 옛사람이소중히여기는것이선조를생각함에있 음은 그 근본을 잊지 않음이니 이럼으로 추념(追 念)함이 하나뿐이 아니라 혹은 갱장(羹墻)에 사모 하고 혹은 상재고향(桑梓故鄕)에 공경하거든 하 물며 오래된 이 집은 함께 기거하며 헛기침 하던 곳이며 효우(孝友)가 전해온 곳임에랴! 모이기 어 려운 사로(四老)가 지팡이 짚고 서로 부축해가며 왔다갔다하던자취가물과 언덕에 어렴풋하여꽃 색깔완연히눈에보이고피리소리분명히귀에들 리니그렇다면후손의슬픈마음으로잊을수없음 이 갱장상재(羹墻桑梓)에 비할 것인가? 이럼으로 감히 잊지 못하는 것은 감히 폐할 수 없는 것이고, 감 히 폐 할 수 없 는 것 은 감 히 떨 어 뜨 릴 수 없 는 것 이니 잊을 수 없는 것은 유허(遺墟)를 이름이요 폐 할 수 없는 것은 중창(重創)을 이름이요 떨어뜨릴 수없는것은계승을이름이다.유허와중창을이미 마쳤으니이대로잘밀어가면계승을또어찌달리 구하랴! 이집에올라장막을걷고담소(談笑)하던즐거움 을 생각하고 이 방에 들어 이불을 같이 덮고 화목하 던 기쁨을 상상하면 부앙첨홀(俯仰瞻忽, 고개를 숙 이고)하는 즈음에 효제(孝悌)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길 것이니 선조의 유업을 이미 받지 않을 수 있겠 는가? 내가 알기로 군자(君子)의 길이 자손에게 복 을 줌이 하늘로부터 하여 높고 밝은 오랜 경사가 오 늘 중수함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니 진실로 그러하면 비록 千百代라도 갈 수 있는 것이니 어찌 특별히 삼 대(三代)뿐이겠는가? 정해(丁亥,1767)년봄에여흥민백순이기문을씀 △박수근(朴守謹) 박수근은호를농와(聾窩)라하였다.문학으로이 름이 있으며, 영조 1년(1725)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 조좌랑과무안현감을지냈다.효도와우애로80이되 도록4형제가같은방에서독서를하며정을이어왔 기때문에비해당(匪懈堂)이라이름하기도하였다. △박수인(朴守認) 자(字)는 인경(忍卿)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이 다. △박수해(朴守諧) 자는화경(和卿)통덕랑(通德郞)이다. △박수원(朴守源) 자(字)는 도원(道源) 통덕랑(通德郞)이다. 성품 이 지효(至孝)하여어려서부터혼정신성(昏定晨省, 밤에는부모의잠자리를보아드리고이른아침에는 부모의 안부를 묻는다는 뜻으로 부모를 잘 섬기고 효성을 다함을 이르는 말)하고 동온하청(冬溫夏淸, 부모를모심에겨울에는따뜻하게하고여름에는시 원하게 모신다는 뜻)하며 자라서는 효성이 더욱 독 실하여이웃마을까지감탄하였다. 정해(丁亥, 1707)년에 선대인(先大人)이 이질 에 걸려 여러 달을 몸져누웠는데 약물과 미음과 죽을 몸소 스스로 달이며 짓되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흉변을 만나게 되자 거상(居喪)에 예를 다하고 무술(戊戌,1718)년에 어머니 김씨가 황달 에 걸 리 고 치 매 까 지 겹 쳐 공 이 손 가 락 을 깨 어 약 에 타서 드려 효험을 보았다.그 뒤 병진(丙辰,173 6)에 상(喪)을 당하여 거의 죽게 되었고 시묘(侍 墓) 3년동안 안색의 슬픔과 곡읍(哭泣)의 슬픔이 하루 같았다.우애목연(友愛睦姸,사랑과 조화)로 벗을 사귀고 지방에 처(處)함에 다 그 마땅함을 얻었다. 가난한 일가들을 위하여 의창(義倉, 구휼 을 위한 곡식 창고)을 만들어 족당(族黨)에 시집 장가 때를 잃고 초상 장사 때가 지나면 모두 고루 나누어 주니 고을 사람들이 범문정(范文正, 북송 의 정치가)의 의장(義庄,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 한농장)에비유하였다. 내동마을은 매곡면의 관문으로 유서 깊은 고장이 며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마을로 조선시대 초기에는 황간견씨(黃澗甄氏,후백제견훤의후예)가많이살 았으며, 내동에 거주하는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을지낸부호(富豪)견계달(甄季達)이무남독녀를1 470년에 영동현감 박원식의넷째아들박지(朴址)를 사위로삼아내동에살게하여충주박씨의세거지가 되었다. 입향조박지선생은참의공(휘진)의장남으로청 백리로 강릉도호부사를 지낸 휘 효함(孝 )의 손 자이다.아버지는사헌부감찰과영동현감을지낸휘 원직이고어머니는여흥민씨이다. 단종2년갑술(甲戌,1454)3월5일에태어났다.공 이 어렸을 때부터 효우가 돈독하고 정대한 의리와 명랑한 자태가 성인과 같아 일찍이 정훈을 받아 학 업이조성하였는데공이12세에친상을당하여호곡 망극하였다. 복을 벗은 뒤에 백씨와 중씨는 제천으 로 피화하고 숙씨는 조몰하고 홀홀단신이 되었는데 황간 견 참군이 공을 맞아 사위를 삼고 말하기를 그 대선장영동현감과일찍이혼약이있었다고하면서 나는 무남독녀라 하고 사위를 삼아 넉넉한 전장(田 庄)을 전해주니 공이 전일 미숙했든 공부를 홀로 익 히고 경리를 조밀이 하고 재용을 절제하여 수년에 부를축적하게되어매년궁절에빈민을주휼( 팽 恤) 하니원근사람이송덕하였다. 불행이도 을사(乙巳, 1485)년 6월 17일에 향년32 세로 조요하였으니 내동 뒷산 건좌(乾坐)에 안장하 였다. 부인 황간견씨와의 사이에 아들 사형제를 낳 으니 맏이는 안주목사 휘 성량이오 둘째는 휘 성간 이요 셋째는 문과 부사 위 성근이요 넷째는 성균생 원휘성권이다. 충주박씨흥학당(興學堂)·봉유재(奉裕齋)·사 로당(四老堂) 선조 유지를찾아븣 [흥학당(興學堂)] 흥학당전경,충북유형문화재제152호.충청북도영동군매곡면내동1길42 세천재전경,보물제2022-48.충북영동군매곡면내오곡마을 흥학당기(興學堂記) [봉유재(奉裕齋)] 봉유재전경, 충청북도유형문화재제402호. 충북영동군매 곡면내동1길40-2 [사로당(四老堂)] 사로당전경,충북유형문화재제151호.충북영동군매곡면민주 지산로3759-13 사로당기(四老堂記) 내동마을입향과박지(朴址)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