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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2월 하순. - 중주지역 문화재예호인 모임 예성동회(회장 유창중)가 입석마을 방문 입석 조사 1979년 3월 하순. - 장준식 당시 예성동호회 회원 단국대학교 측에 비석에 관한 제보 1979년 4월 5일 오후 1시 40분 - 황수영, 정영호 박사, 입석마을 도착하여 처음으로 비석을 확인 - 대왕, 국토, 동주 등의 글자를 확인하고 전면과 좌측면 탑영 - 전면에 10행, 좌측면에 7행, 각 행마다 20여 자씩, 모두 400여 글자 추정 - 신라토내, 사자, 상하 등 글자 판독 - 고증한 예서풍의 글자나 명문으로 보아 신라 석비로 추정 - 충주 시대 산다실에서 탑영희 명문 판독 - 신라비의 가능성 공감 - 4.28일 조사예정이던 계획을 앞당겨 4.7~8로 결정 1979년 4월 7일 - (오후 1시)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27명) 출발(단국대 사학과 및 국문화 : 정영호, 차문섭, 박천규, 이호영, 김상현, 남풍현, 정명환, 이화숙등 8명과 정장호(세종대), 김광수(건국대), 장충식(동국대) 등 외부교수 3명등 총 11명의 교수진과 16명의 학생들 -(오후 4기 30분) 입석마을 도착 -(오후 6시30분) 바위 이끼 제거 작업 1979년 4월 8일 - 천막설치 후 오전 6시부터 오전 11시까지 이끼 제거작업 - (오전 11시) 석비에 대한 고유제 올림/첫 탑영 진행 - (오후2시) 전부대사자, 절교사, 제위상하, 입이월이십삼, 모인삼백, 신라토내당주, 하부수위사, 모인신라토내중인, 국토, 고무루성수시하부 등의 명문 확인 -(오후 3시 20분) 고려태왕 판독으로 고구려비임이 확인됨 - (우후 4시) 정영호 단장 조사 결과 발표 1. 이 석비는 고구려비임 2. 석비의 성격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개척한 척경비로 추정 3. 5세기말 고구려 전성기 때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 - (오후 8시) 훼손 방지를 위해 충주고구려비를 마을 창고로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