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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4월30일 일요일 12 (제196호) 기획 선비란사(士)혹은유자(儒者)등을일컫는우리말이다.직접적으로는중국송나라의주희(朱熹)에의해완성된주자 학즉성리학(性理 學)또는도학(道學)을공부한지식인을말한다.즉성리학적지식과교양을갖추고의(義)를실천하는사람이선비인 것이다.2013년에 이어2022년11월25일함양문화원공연장(3층)에는지역유림이가득메웠다.유성기동북아재단경제원원장의‘함양 의참선비박충좌 선생의생애와사상’의주제발표와토론을지켜보기위해찾은것이다. 이자리에서유원장은『치암박충좌는함양에서태어나어릴때부터총명하기에남달랐고공부를좋아해이른나이 에과거에급제했 다.고려후기의유학자로성리학도입기에스승백이정의가르침을받아동문이제현과함께성리학의학문적기초를 닦았다.이런성리 학적지식을바탕으로자신에게는엄격했고,자기수련에충실했으며,대외적으로올곧고불의에는단호하였으며,청 빈한선비의삶을 살았다.당시부패하고타락한고려말의정치상황에서불의에굴하지않는선비정신을몸소실천한대학자였다.』였 다고소개해이번 호에서는유원장의글을인용‘함양의참선비치암박충좌선생’을소개해본다. 치암 박충좌 선생은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군부총 랑을 지내고 함양부원군에 봉해진 아버지 박장(朴 莊)과 어머니 고성이씨 사이에서 1287년(충렬왕13) 에태어났다.자(字)는자화(子華)호는치암(恥菴), 시호는문제(文齊)이고본관은함양이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좋아했다. 집안이 모 두선비였고,아버지형제4명이모두과거에합격하 였으니책을가까이하는집안의이력때문인지14세 때인 1300년(충렬왕 26)에 남성시(南省試·進士試) 에합격하여태학에들어갈수있었다. 1308년 백이정 선생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성리 학)을 배우고 돌아오자 많은 지원자 중에 제일 먼저 이제현과 함께 ‘성리학’, ‘주자가례’를 배웠다. 그는 첫 관직으로 혜민국(惠民局,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 여주던관아)판관(判官)에임명되었다. 1313년(충숙왕즉위년)문과계축방(癸丑榜)에서 급제한이래로충숙(忠肅)·충혜(忠惠)·충목(忠穆)· 충정왕(忠定王) 때까지 내서사인(內書舍人), 밀직 제학(密直提學), 개성부윤(開城府尹)을 거쳐서 삼 도의안렴사(按廉使)를지냈다. 1332년 첫 번째 전라도 안렴사 때 왕의 총애를 받 던 박연이 왕의 내지를 가지고 와서 양민을 노예로 삼겠다는 것을 이를 허락지 않으니 박연의 허위 참 소로곤장을맞고먼남쪽섬에귀양가기도했다. 1344년(충혜왕 복위5)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 어 동지공거 이천과 진사를 뽑아, 갑신방 문과에서 하을지등33인을급제시켰고,제조관판전민도감사 를역임하였다. 1344년 6월에는 찬성사가 되어서 경연에서 입시 하여왕에게‘정관정요’를시강하여상을받았다. 삼중대광 판삼사사 순성보덕협찬공신에 책록되 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47년 (충목왕3)에역대명신시호중처음으로시호인‘문 제(文齊)’가내려졌다. 그는1348년병중에도천하의간신이자패륜아강 윤충(康允忠)의죄악을들어그를파직하게하고극 형에 처하라는 탄핵상소로 마지막 선비정신을 발휘 했다. 그리고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349년 63세의 일기로타계하였다. 치암 선생은 청주 한씨에 장가들어 들하에 5남 2 녀를 두었다. 한씨는 밀직부사를 지낸 한안지(韓安 之)와한양군부인의딸이다. 장남소( 墳 )는전의녹사(典儀綠事,정9품)가되었 으나 조졸했고, 네 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가 문을빛냈다.차남정(珽)은문과급제하여영복도감 판관을 지내고 찬성(贊成)으로 함양군에 봉해졌고, 현재 이천, 수원, 평산, 봉산 등지에 살고 있다. 삼남 경(瓊)도급제하여군부판서를지냈고,후손들은옥 천,청주,진천등지에세거하고있다.사남번( 物 )은 급제후 낭장에 이어서 지평을 지냈고, 후손들은 구 리, 순천지역에 살고 있으며, 오남 여(璵)는 전(琠) 으로 개명하여 문과 장원을 하여 위위주부, 밀직사, 지신사에 이르렀으며,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으 며,후손들은예천,상주,칠곡,영해,진주,하동,함양 등지에많이살고있다. 장녀는 내시(內侍) 적중랑(適中郞)에 시집갔으 나 남편이 죽자 함께 하였고, 차녀는 천우위 녹사참 군부후에좌찬성홍유룡에게시집갔다. △성리학의입문과과거급제 박충좌는 천성적인 자질이 영특하고 항상 용모가 단정하고양친을사랑하고어른을공경하는예의바 른아이로알려졌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이른 나이에 가정의 교훈을 받아 13세 때인 1300년(충렬왕 26)에 (南省 試·進士試)에합격하여태학에들어갔다.그는첫관 직으로혜민국판관에임명되었다. 1308년 백이정이 원나라에서 정주학(성리학)을 배우 고려로 돌아오자 치암은 이제현과 함께 제일 먼저가르침을받았다. 스승 백이정이 1298년 8월 충선왕이 왕위를 부친 인충렬왕에게돌려주고원나라로소환될때총선왕 을 따라 연경에 머물면서 10년간 원나라 학자들과 정주학을배우고연고한후1308년충선왕이왕위계 승을 위해 환국할 때 많은 성리학 관련 서적을 가지 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배운 학문을 후학들에게 전수하기시작했는데제일먼저치암과익제를가르 쳤다. 그 덕분인지 치암은 1313년(충숙왕 즉위년) 문과 계축방(癸丑訪)병과1위로급제하였다. △치암의강직한선비상 1332년 전라도 안렴사(全羅安廉使·都事, 현 도지 사)를 지낼 당시 왕의 총애를 받는 박연(朴連)이 왕 의 내지(內旨, 임금의 은밀한 명령)를 전하며 양민 을 노예로 삼으려 하는 것을 용인해주라는 것이었 다. 치암이 부당함을 주장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 러자 그가 참소하기를 안렴사가 왕지(王旨)를 받들 지 않고 헌 종잇장처럼 버렸다고 무고 하니 왕이 노 해 곤장을 친후 그해 정월 말에 해도(海島)로 유배 보냈다.(高麗史節要 卷25, 朴連했 全羅道按廉朴忠 佐,杖流海島.) 뒤에 무고임이 밝혀져 해배후 감찰지평에 임명하 였으나칭병하여나오지않으니다시예문응교를제 수하여 겸하여 경상도 염세별감을 임명하였으나 부 임하지않았다. 1332년 충숙왕이복귀하니중서문하성의종4품직 인내서사인과직보문각으로옮겼고,전라도에이어 양광도안렴사(지금의 경기 및 충청도)를 제수 받아 선정을베풀고동아와사의대부로집무하였다.1335 년경 상도관찰사를지냈고,다시1340년경상도관찰 사를재임했다. 이렇게 네 번이다 안렴사(관찰사)로 풍속을 살펴 본 것은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임했기 때 문이다. 다시 소부시와 전교시판사를 거쳐 중추원 정3품직인 밀직제학에 임명되었고,개성윤(현 서울 시장)에 임명되었다.이는 지방의 행정을 잘 살피니 중앙행정을맡긴것이다. 특히 마지막 상소인 간신 강윤충의 탄핵 상소는 선생의강직함을보여준다.1348년그는병중에도이 제현, 김륜 등과 함께 ‘영귀(榮貴)를 탐하여 백가지 로욕심을부리어일대(一代)의흉악을저지르는자 이며, 간신이자 간통을 일삼는 천하의 패륜아 강윤 충(康允忠)의죄악을들어그를파직하게하고극형 에 처하라는 탄핵상소로 마지막 선비정신을 보여주 었다. 강윤충은 원래 천인이었으나 충숙왕을 섬겨 호군 (護軍)이되었다.일찍이김남보의처와낭장백유의 처를 강간한 일로 감찰사의 탄핵을 받아 누차 장형 을 가하여 섬으로 귀향을 보냈다. 그리고 오래가지 않아 다시 첨의 찬성과 밀직부사로 기용되었다. 본 처가있는데도고인조석견의처에게장가들어그의 유산을착취하였다. 1399년의조적의난때충혜왕을시종한공으로13 42년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이듬해 첨의평리에 올랐 으며,충목왕 때 찬성사가 되고 1347년 왕을 꾀어 조 득구를탐라로귀향보냈다. 충목왕의 어머니 덕녕공주와 통정을하고 그녀의 총애를 받으며 정권을 장하여 세도를 부렸다. 또 정 방(正房)의 제조(提調)가 되어 인사권을 쥐고 벼슬 을 팔아 많은 뇌물을 챙겼다. 치암의 상소로 강윤충은 1348년 탄핵받아 파직 되었지만 치암의 사후 1354(공민왕3) 다시 찬성 사로 판삼사사로 승차했다. 그러나 그도 명이 다 했는지 1356년 호군 임중보의 반역에 관련되어 동 래 현령으로 좌천되었고, 3년 뒤에 살해당했다고 한다. △치국에대한강론을하다 치암은1344년충목왕이즉위해개혁을추진할때 양천군 허백과 함께 판전민도감사가 되어 활약했으 며,다시홍문관대제학감춘추관사판군부사사(정2 품)로 옮겼다가 이어 도첨의 찬성사(정2품)를 제수 받고 왕의 사부가 되어 조석으로 올바른 말을 올렸 다. 6월에는 선비의 최고 선망이 되는 서연(書筵, 왕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에 들어가 왕을 모시 고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의했다. 그는 정관정 요는군주가실천하지않으면휴지조각에지나지않 음을 역설했다. 이에 대해 고려사절요25권에는 ‘찬 성사(贊成事) 박충좌(朴忠佐)가 『정관정요(貞觀政 要)』를 강론하고 또 연(燕) 소왕(昭王)이 황금대를 세워곽외(郭 즉 )를맞이한일을말하니,초( 힛 )50정 을 하사하였다.’고 소개한다.(贊成事朴忠佐講貞觀 政要,又言燕昭王築黃金臺迎郭즉 之事,賜힛 五十錠) ‘정관정요’는 정관은 당 태종의 연호이고 정요는 정치의 요체라는 뜻으로 정관정요는 당나라의 전성 기를 이끌었던 태종(626~649)과 위징, 방현령, 장손 무기 등 측근 신하 간의 국가 경영에 관한 문답서를 춘추필법으로기록한책으로현종때역사가오긍(6 67~749)이항목을분류하여엮은책으로치도(治道) 의 요체를 말한 것이다.이 책이 제왕학의 기본 성전 이된이유는어떻게하면국가와국민을잘살게할 것인가하는문제와처방이자세하게기술되어있으 며, 고려시대 임금들은 이 책을 중시하였고, 지금도 정치인들의필독서가되고있다. 또, 서연의 자리에서 연나라 소왕이 황금대(黃金 臺)를 쌓아 곽외(郭外)를 맞이한 일을 말해 주니 지 폐50장을하사하였다는내용이다. 이 고사는 사마천의 사기 연소왕세가(燕昭王世 家)에 실려있다. 핵심 내용은 춘추전국시대 국토가 좁고인구가적은약소국연나라의생존방법에대한 사례인데이는치암이당시강대국원나라의부마국 으로 전락한 약소국 고려가 처한 상황을 곽외와 선 종외시(先從 즉 始)의 고사를 통해 왕에게 치국의 방 법을지도하고있다고본다. 이고사의줄거리는연나라소왕은제나라에침략 당해 선왕이 당했던 치욕을 씻기 위해 부단히 보복 하려고 절치부심하고 있지만 그 일을 도모할 만한 능력 있는 인재를 찾지 못하고 있다며 곽외에게 조 언을 구했다. 곽외는 매사마골(買死馬骨)의 고사를 들면서 우선 가까이 있는 자기부터 먼저 선종외시 (先從즉 始)써보라고했다.그러면천하의인재들이 소왕의 어짊을 알고 저절로 찾아오게 된다고 하였 다. 왕은곽외를위하여황금대를건축하고그를스승 으로 섬기자 이 소문이 세상에 알려져 장수 악의(樂 毅)가 위(魏)에서 음양가 추연은 제(齊)에서 극신 장군은 조(趙)로부터 모여드는 등 천하의 인물들이 다투어연으로모여들었다.이들이국정을개혁하여 크게 부강하게 되자 마침내 제(齊)나라를 깨뜨렸다 는이야기이다. 1345년 1월 다시 정방(正房)을 설치하여 박충좌, 김영후,신예를제조관으로임명하였으며,같은해4 월에는 박충좌를 전국의 출납을 총괄하는 삼사(三 司)의 종1품직인 삼중대광 판삼사사로 임명하였다. 이어서 순성보덕협찬공신 삼중대광(정1품)에 책록 되고함양부원군에봉해졌다. 박충좌와 이제현은 10년간 원나라 연경에서 주자 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백이정을 찾아가 맨 처음 가 르침을받았는데스승백이정이충숙왕과충혜왕부 자간 왕권 다툼에 휘말리게 되어 경남 남해의 난포 현(현남해이동면)으로유배를가게된다. 이에 박충좌는 자신의 벼슬을 내려놓고 스승의 유배지 남해까지 따라가서 스승을 극진히 모셨다. 귀양살이로 병약해진 스승이 식사를거를때는 자 신도 음식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고령인 스승께서 귀양살이의 고달픔을 이기지 못 해 몸져누우셨다.박충좌는 백방으로 약을 구하러 다녔지만 제대로 된 한의사가 없는 섬에서 약을 구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유배지에서 멀리 떨어진 금산까지 가서 직접 약초를 캐어 탕약을 끓여 부모 모시듯 지극 정성으로 스승을 병간호 하였다. 그러다가 치암의 정성에도 스승 백이정이 세상을 떠나자 극진히 유택으로 모신 후 다시 벼슬길에 올 랐다고 한다. 유배된 스승을 따라와 지극정성으로 모셨다는박충좌의이야기는사제간의도리를오늘 날 교육 현장에서 되새기게 하는 귀감이 되는 사례 이다. 치암선생은이렇게나라를위해충정을다했으나 평소지병인소갈병(당뇨)으로고생을많이하였다. 더이상공무를수행키어려워지자거처를대화엄종 도승통(大華嚴宗 都僧統)으로 옮겨 법희(法喜)로 서병을치료하고자했으나위독해지자사제로돌아 와 타계하였다. 1349년(충정왕 원년) 윤 7월 18일에 향년 6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고려사 권37, 1349 년윤7월18일(음)정축(丁丑)咸陽府院君朴忠佐卒 선생이세상을떠나는날에는많은사람이안타까 워하였다고 한다. 특히 선생의 동갑내기 동문이자 절인인익재이재현이선생을애도하는만시를지었 다. 그는 자신과 박충좌의 관계를 문경지교(刎頸之 交)이 주인공인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명신 인상 여(藺相如)와명장염파(廉頗)에비유했다. 선생은 문제(文齊)라는 시호를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로 사대부가 받은 시호라고 한다. 이전분들의 시호는사후에추서하는데특별함이있다.묘지명에 는 고려국 순성보덕협찬공신 삼중대광 함양부원군 문제공(文齊公)으로 되어있다. 그는 고려의 최고의 벼슬을 하였고, 성품이 온후하고 검약하여 ㅂ록 재 상(宰相)이되어서도집과의복을포의로있을때처 럼 간소하게 하였다. 또 주역을 즐겨 읽으면서도 드 만두지 않았다.(고려사절요)동년 9월 15일 계유(癸 酉)에 속촌(粟村, 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속촌리)에 장사지냈다. 치암 박충좌 선생은 참선비의 전형이며, 고려사 열전에 처음 함양사람으로 등장하는 대학자요 정치 인이었다.산생은충선왕,충숙왕,충헤왕,충목왕등 네 임금을 섬기면서 네 번의 안렴사,예문응교,내사 사인,밀직제학,개성윤,판전민도감사.정방제조,지 공거, 찬성사, 판삼사사를 역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쌓았다. 치암 선생의 업적은 묘지명에 잘 나타나있다. 공 (公)은 자질이 온후하고 친족에게 화목하고 벗에게 신의가있었고,관(官)부원군에이르렀으나사는집 을 개축하거나 단청도 하지 않았고, 옷은 아름다운 것을입지않았으며,우거하는곳을치암(恥菴)이라 하였다. 스승을 섬김에 있어 지극정성으로 섬겼으니 교권 이무너지고있는지금에치암선생의예(禮)는본받 아야할최고의가치인것이다. 선생은스승백이정을모신경남남해의난곡사와 경북예천의금곡서원에배향되었다. 함양의참선비 치암 박충좌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 생애 난곡사전경,경상남도남해군이동면난음로219번길7-14.스승백이정과제자박충좌이야기는입에서입으로전해졌고,남해사람들은이동 면난음리에난곡사(蘭谷祠)를지어백이정을주향으로박충 좌와이제현을배향하고매년음력3월10일유림과후손들이향사를올리고있다.(경상남도문화재자료제237호) 치암공박충좌존영. 난곡사. 예천군명곡서원숭덕사. 치암공의학문과사상의형성 사제지간의도리를몸소행한박충좌 치암선생의타계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