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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리(挑津里) 마을지명 유래 도원(挑源), 도진(挑津), 도진동, 도진리(挑津里) 1350년(高麗末)대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사재감소윤(司宰監少尹)이신 고령박씨(高靈朴氏) 박경(朴景, 고령박씨중조 환(還)의 8세손)공이 마을을 개척하여 모듬내(會川, 錦川)를 휘감아 흐르는 강변(江邊)의 아름다움이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과 흡사한 아름다움이라 도원(桃源)으로 불러졌다. 이후 마을을 이루면서 나룻터가 생기니 도원나루로 불리어지다 1500년경부터 나루 진(津)자를 사용한 도진으로 표하면서 도진동, 도진리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建國)될 때인 1392년 고려의 조신(朝臣)인 몽게 한철중, 김유, 사관 권공, 박간, 박용수(입향조 박경의 제) 제씨들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이곳에 은거(隱居)할 때 전해진 시(詩)는 도화협진 궐어발발 무이어무릉도원(桃花狹津 궐魚潑潑 無異於武陵桃源. 복숭아 꽃잎이 물위에 떠흐르는 나루에 쏘가리떼가 뛰어노니 어찌 무릉도원과 다를 바 있나)이라며 도원(桃源)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시가 전해지고 있고 개척한 박경 공의 후손(後孫)이 고령박씨 소윤공파(少尹公派)의 본향(本鄕)을 이루면서 도진박씨(桃津朴氏)로 칭(稱)하여지는 집성촌(集姓村)으로 대(代)를 이어 세거(世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