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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며, 그 해 5월 박헌영(朴憲永)의 공산주의 노선을 공개서한을 보내어 비판하였다. 1 개월 후인 6월에는 조선의 건국은 ‘민족 전체의 자유생활보장’을 내걸고 노동계급 의 독재, 자본계급의 전제를 다같이 반대 한다는 중도통합노선을 주장하고 조선공 산당과 결별하였다 그 해 8월 이후부터 미군정당국의 좌우파합작을 지지하고 협 력하였으며, 1948년 5·10선거 때 인천에 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당시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직을 맡았다. 정부 수립 후에는 이승만정권의 초대 농 림부장관이 되어 농지개혁을 추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1952년 제2대 정· 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다가 차점으로 낙선했다.이승만은 차점으로 낙산된 조봉 암에게 불안감을 느끼고 이중간첩 양명산 을 포섭하여 간첩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집행 하였다. 1956년 5·15정부통령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신익희 사후 야권 후보로 전체 유효투표자 수의 30%인 216만표를 얻었 다. 이를 바탕으로 동년 11월 책임 있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 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사회민주주 의 정당인 진보당(進步黨) 창당준비위원회 를 발족하였다. 1956년 5·15정부통령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신익희 사후 야권 후보로 전체 유효투표자 수의 30%인 216만표를 얻었 다. 이를 바탕으로 동년 11월 책임 있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 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사회민주주 의 정당인 진보당(進步黨) 창당준비위원회 를 발족하였다. 1957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선임 되었으며, 1958년 5월 국회의원선거에 지 역구후보를 내세워 원내에 진출하였다. 1956년 5·15정부통령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신익희 사후 야권 후보로 전체 유효투표자 수의 30%인 216만표를 얻었 다. 이를 바탕으로 동년 11월 책임 있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 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사회민주주 의 정당인 진보당(進步黨) 창당준비위원회 를 발족하였다. 조봉암의 복권과 관련해서는 학계 및 정 치권에서 여러차례 시도가 있었다. 1992 년 10월 여야 국회의원 86명의 서명한 사 면 복권 청원서가 국회에 제출되었다. 2007년 9월 27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조봉암이 연루된 진보당 사 건이 이승만 정권의 반인권적 정치탄압이 라고 결론을 내리고, 국가의 유가족에 대 한 사과와 독립유공자 인정, 판결에 대한 재심 등을 권고하였다.이후 52년이 지난 2011년 1월 20일에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서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전원 일 치로 무죄가 선고되어 복권되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 야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