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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 것도 민초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며. 그 결과, 33인들 중에서 한용운을 비롯한 소수 를 제외한 이들의 투옥 기간이 5년 미만이었던 것에 비해서, 후기 시위 주동 인물들은 10~15년이 넘는 장기형을 선고받게 되는 것에서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이었는지가 단적으 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33인의 민중피해 대책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안위 를 먼저 걱정하여 피신하기에 급급하였으며 그중 일부 인사는 일제의 회유책에 넘어가 친일의 길을 걸었던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5) 미완성의 저항운동 일제에 의해 집계된 200만 명은 당시 조선 인구의 6.31%에 달했습니다. 이보다 훨씬 도시화와 교통 및 통신 발달이 진행된 1987년 6월 항쟁도 참여 인원은 전인구의 4.8%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기록이 깨지는 것은 2016년 박근혜 국정농단퇴진 촛불시위 였습니다. 다만 이 기록은 주최 측의 추산이라 과대집계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3.1 운동 의 참가자 수도 일제가 과소집계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인구 비율로도 3.1 운동이 더 많 이 참가했기에 여전히 한국사 최대의 시민운동이라고 해도 맞는 말이며, 많은 자료에서 3.1 운동을 한국사 최대의 시민운동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지도부가 부재한 상황에서의 산발적 저항이라는 형태의 한계를 드러낸 사 건이기도 했습니다. 비폭력 만세 저항운동의 문제라는 것은 후기 농민과 학생층이 주도 하는 과정에서는 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산발적으로만 이루어져서 일 본제국주의 무장경찰의 해산 움직임에 각개 격파당하는 상황이 벌어졌으며. 3.1 운동이 전국에서 무려 2개월 정도에 걸쳐서 일어났다는 것 또한 일이 큰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도층이 따로따로 움직인 덕분에 3.1 운동을 전후로 국내의 저항운동은 침체기에 빠지기 시작했고, 저항 노선은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러한 한계는 독립운동 세력의 개혁을 불러왔고, 단결을 통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하였 으며 실제로 이 시기 임시정부가 곳곳에 설립되었으나 몇 개는 실질적인 영향력이 없었 고, 3개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에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민간의 재발견'이 이루어지게 된 것도 3.1 운동이 계기가 된다. 이전 지식인들에게 민간인은 말 그대로 교화의 대상이지 독립운동의 동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