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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 한편 "대한독립 만세" 는 일종의 상징처럼 굳어진 구호지만 사실 3.1 운동 때는 "조선 독립 만세!"라는 구호가 많이 쓰였으며.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가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 에 '대한독립 만세'라고 외쳤다고도 하지만,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었어도 당시 사람 들에게는 여전히 '조선'이라는 국호가 더 친숙했습니다. 당시의 신문 보도나 3.1 운동 이 후 전국에서 벌어진 만세운동 전단지에는 '조선 독립 만세'라고 쓰여 있는 기록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며 당장 기미독립선언서에도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라고 적혀있습니다.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이뤄짐에 따라 서서히 태극기가 만세 항쟁의 상징으로 자리매 김하게 되었다. 대전군 유성면에서는 조선이 독립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마을 한복판에 태극기를 달았으며, 전라남도 연안에서는 어선들이 태극기를 단 채 조업을 벌이기도 했 습니다. 다만 3.1 운동에 참가한 민간인들은 국제 정세에 대해 매우 어두웠다. 한 예로 1919년 4월 1일 오전 10시, 황해도 해주에서 5천 장의 전단지를 뿌리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5명의 여자들은 "우리가 일제히 독립을 외치면 세계의 이목은 우리나라로 집중될 것이요, 조선은 세계 강대국의 동정을 얻어 민족자결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3.1 운동에 200만의 조선 민간인들이 참가하여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어도 세계 강대국들은 끝끝내 조선 독립을 외면했으며 당시 일본은 제1차대전의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어떤 나라가 압력을 가해 조선을 독립시키게 하는 일은 불가능하였고 결국 조선 의 독립은 일본이 2차대전의 패전국이 되는 1945년 8월 15일로 미루어지게 됩니다. 4) 피해규모 박은식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3.1 운동에 참여한 시위 인원은 약 200 여 만 명이며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1 운동은 최초의 시민 주도 운동이며 이전과는 달리 어떤 특정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게 아니라 민간과 지식인들이 스스로 일본의 식민통치에 반감을 느끼고 가담했기 때 문이다. 또한 초기 운동의 시작에 한해서 비폭력 투쟁을 넘어 적극적 저항으로 나아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