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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 어 주민들을 직접 처형한 경우도 있었는 데, 희생지는 내남면 노곡리 계곡, 천북면 화산리 계곡, 건천읍 송선리 계곡, 울산시 강동면 신명리 계곡, 감포 앞바다 등이었 다. 총살에 동원되었던 경주경찰서 경비계 근 무자 한씨(한신출)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 했다. “전쟁 직후 두 차례에 걸쳐 내남면 현장에 동원된 사실이 있으며 첫 번째 동 원되었을 때는 어느 날 밤이었다. 경찰서 에 구금된 남로당원들을 대구형무소로 이 송하는 트럭에 탑승하도록 차출되었고 실 탄 50발을 지급받았는데 트럭이 도착한 곳은 대구형무소가 아닌 내남면 노곡동의 골짜기였다. 당시 현장은 사찰과장인 박용래가 지휘 했으며 나에게는 5명의 여자를 처형하라 는 지시가 떨어졌으나 머뭇거리고 있자 다른 동료 경찰이 그 여자들을 사살하였 다. 이후 사찰계가 돈을 받고 처형될 사람 들을 빼돌린다는 정보가 당시 월성군청에 주둔 중이던 CIC대장에게 들어갔고 그 이 후부터 처형자에 대한 관리와 지휘는 CIC 가 담당하였다. 두 번째 현장에 동원되었 을 때는 낮 시간이었으며 현장에는 이미 주민들이 구덩이를 파놓은 상태였다. 당시 현장은 이북 출신의 CIC대장이 지휘하였 는데 그 날 처형된 사람은 65명 정도였으 며 처형자 중에는 15세도 안 되는 소녀도 있었다. 처형될 사람들 중에 일부가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이 뒤로 묶인 채 뒤에서 총격을 받고 구덩이 속으로 쓰러졌으며 몸속 장 기가 앞으로 쏟아져 나왔다. 당시 CIC대장은 한 차례 총격이 끝나면 ”총을 맞지 않은 사람은 부탁을 받아서 일부러 쏘지 않은 것이니 일어나라“고 하 였으며 이 말을 듣고 구덩이 속에서 일어 난 사람은 CIC대장이 삽으로 머리를 내리 쳐 죽이기도 하였다. 처형이 끝나면 다시 마을 주민들이 동원되어 시신을 묻었는데 당시 유치장이 차면 현장으로 끌고 와 처 형을 하였으며 다른 동료들도 몇 차례 현 장에 동원되었다.” 경주경찰서 근무자 김씨(김상록)는 “전 쟁 직후 경주경찰서 남쪽 운동장에 보도 연맹원들이 집결한 채 트럭에 올라타고 있었으며 이들은 이후 배에 실려 감포 앞 바다에서 수장되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산내면 대한청년단원이었던 이씨(이임출) 는 “산내면 의곡 창고에 구금된 사람들의 경우 재판을 받으러 간다며 GMC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출발하였는데 그 사람들은 이후 건천에서 산내로 넘어가는 감산재라 는 곳에서 처형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했다. 경주경찰서 근무자 최씨(최기성)는 경주 역에서 보초를 서면서 감금된 100여 명의 주민들을 감시했는데, 모두 트럭에 실려 나가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들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