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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그렇게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다 대학 시절 구속되기도 한 그는 졸업 이후 우연히 카메 라를 들게 됐다. 구속 경험과 함께 당시 IMF 구제금융으로 경기가 위축돼 취직이 힘들었 기 때문이다. 보험 영업 등 여러 일을 하며 지내다 2000년대 초반 그가 살던 경남 창원 민주노총 지역사무실에 갔다고 한다. 총파업 기자회견을 하는데, 취재하러 방송사 카메라 하나 오지 않아 불만이라는 볼멘소리를 들었다. 웨딩 촬영으로 시작된 그의 영상 인생 2003년 카메라를 들고 달려간 배달호 열사 투쟁 현장 “‘안 오면 내가 찍으면 된다’고 너무 쉽게 이야기했어요. 찍는 거 배워서 하려고 했는 데 솔직히 카메라, 컴퓨터 등 준비가 제대로 안 되니깐 힘들더라고요. 책 보면서 배우다 가 포기했어요. 더구나 결혼한 몸이어서 더 배우긴 어렵다고 생각해 취직자리를 알아보 려고, 생활정보지를 뒤지는데 ‘웨딩 촬영’을 모집하더라고요. 지원했는데 나이가 많다며 처음엔 안 뽑아 주려고 했어요. 34살이었거든요. 사정사정해서 일은 시작했지만, 10살이 넘게 어린 사람들에게 어깨너머로 영상편집을 배웠어요. 텃세가 심했거든요. 그렇게 10 개월 정도 배우니깐 조금 알겠더라고요.” 영상 작업이 손에 조금 익어갈 무렵 그에게 경제적 위기가 닥쳤다. 빚이 쌓이고, 압류 를 당할 위기였다. 대리운전에 웨이터까지 하면서 버텼다. 코피를 쏟으며 일했지만, 감당 하기 힘들었다. 결국, 이혼이라도 해 가족들까지 피해가 번지는 걸 막아야겠다고 마음먹 은 순간이었다. 그때 구 감독의 매형이 퇴직금 2천 만을 빌려주면서 급한 위기를 넘겼다. 매형은 ‘영상을 본격적으로 찍을 거면 카메라를 마련하라’며 800만 원을 추가로 지원해 줬다. 그렇게 마련한 카메라로 웨딩촬영을 이어갔고, 민중의소리 경남 지역 기자로 활동 하는 등 활동도 이어갔다. 그러다 어린이 예술학교 촬영 등 돈이 될만한 일거리가 들어왔지만, 그는 가지 못했다. 2003년 1월 9일 새벽 경남 창원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당시 50세)가 사내 ‘노동 자광장’에서 분신·사망한 상태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노조탄압, 손배가압류에 시달리던 그는 유서를 통해 해고와 재산가압류, 급여가압류, 노동조합 말살 등을 자행하는 사측과 사법부를 규탄했고, 사회가 해고 노동자와 노동조합, 가족들을 보살펴 주기를 희망했다. 배달호 열사의 죽음을 본 그는 현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