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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이러한 과정과 함께, 같은 해 6월 29일 제9차 전당대회를 개최, 대통령후보에 이 승만, 부통령후보에 이기붕(李起鵬)을 지 명하여 재빨리 선거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한편, 민주당에서는 대통령후보 결정을 둘 러싸고 신·구파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 져 10월의 정·부통령후보 지명대회마저 연 기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1월에 들어와 서야 전당대회를 열 수 있었다. 민주당은 11월 26일의 전당대회에서 신· 구파간의 실력 대결을 통하여 구파의 조 병옥(趙炳玉)을 대통령후보로, 그리고 신 파의 장면(張勉)을 부통령후보 겸 당대표 최고위원으로 각각 선임하였다. 군소정당들도 각기 1960년의 정·부통령선 거의 대책마련에 부심하여, 통일당은 11월 18일김준연(金俊淵)을 부통령후보로 지명 하고 동시에 이승만을 대통령후보로 지지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며, 노농당(勞 農黨)은 당명을 민족주의민주사회당으로 개칭하고 대통령후보에 전진한(錢鎭漢), 부통령후보에 이훈구(李勳求)를 각각 지명 하였다. 이처럼 야권의 선거전 전열정비가 내부의 사정으로 인하여 늦어지자, 조기선거실시 가 상책이라고 판단한 자유당은 11월부터 본격적인 선거대책을 세우고 부정선거를 사전에 준비해 나갔다. 내무부장관 최인규(崔仁圭)는 전국경찰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일선 경찰서장을 연고지 중심으로 재배치시키 고, 이어서 전국 시·읍·면·동 단위로 공무 원친목회를 조직하는 등 득표를 위한 활 동을 지시하였다. 또한, 내무부는 11월부터 다음해 2월 사 이에 전국 각급 기관장에게 다음과 같은 구체적 부정선거 방법을 극비리에 지시하 였다. 즉, ① 4할 사전투표, ② 3인조 또는 5인 조 공개투표, ③ 완장부대 활용, ④ 야당 참관인 축출 등을 통하여 자유당후보의 득표율을 85%까지 올린다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완벽하 게 수행하기 위해서 중앙당으로 하여금 거액의 선거자금을 마련하게 하였다. 자유 당 중앙당에서는 선거자금 모금목표를 당 시 화폐로 50억 환으로 책정, 재무부와 국책은행인 한국은행·산업은행을 비롯한 시중은행과 굵직한 기업체들로부터 돈을 거두어들여, 거의 70억 환을 모금하였다. 1960년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 병옥은 신병이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면서 조기선거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 혔으나, 정부는 농번기를 피해야 한다는 이유로 3월 15일을 선거일로 공고하였다. 그러나 2월 15일조병옥이 급서함에 따라 선거를 통하여 정권교체를 염원하던 국민 들은 1956년의 신익희(申翼熙) 야당 대통 령후보의 죽음에 이어 또다시 실망과 좌 절을 겪어야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