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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3월31일 금요일 11 (제195호) 독자마당 『논어』에는 “효와 제라는 것은 인(仁)을 행 하는 근본일 것이다.(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 「學而」)”라고 말하여 공자의 중심 사상인 인 (仁)이 행위로 나타남이 효제(孝弟)라고 설명 했습니다.다산도같은뜻으로“효와제는인을 행하는근본이다.(孝弟爲行仁之本:「示二兒家 誡」)”라고 아들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효 도란부모님을사랑하며제대로봉양해드림을 뜻하고 제란 형제간에 우애하는 일을 말합니 다.언뜻 생각하면 공자나 다산의 말씀은 참으 로답답한옛날이야기일뿐,현대의삶과는무 관한일처럼느낄수도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효도하고 우애하는 일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세상이 라면 도대체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가 어 디에있을까요.밥만먹고돈만벌고권력만추 구하는 것이 인간의 삶 전체일 수는 없습니다. 부모에게효도하고형제간에우애하는인간의 기본 윤리가 행해지지 않는 세상이라면 도대 체 삶의 보람이 어디에 있다는 말일까요.각박 하고 메마르기 그지없는 야박한 세상,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첫째 행위가 효제이기 때문에 공자나 다산은 그렇게도 그 점을 거듭거듭 강 조하고반복해서이야기했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인륜이 파괴되는 온갖 사건 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 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이 끊이지 않고 일 어나고 있습니다. 형이 아우를 속여먹고 아우 가 형을 괴롭히는 일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 다.이런무서운범죄나못된일들은효제에대 한 공부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산은 아들들에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해서 효제와 독서를 그렇게도 강조했습니다. 왜 효제를 행 해야 하고 왜 독서를 강조했는가에 대한 이유 는설명이필요없습니다. 효도가얼마나중요한일인가를다산은아주 쉽게 아들들에게 설명해 줍니다. 친구를 사귈 때도 그냥 자기에게 잘 해준다고 해서 친구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친구를 제대로 사귀려면먼저그의집에찾아가2~3일묵으면 서 그가 가정에서 부모에게는 어떻게 하고 형 제 사이에서는 어떻게 하는가를 관찰한 연후 에,효제를 제대로 행하는 사람은 친한 친구로 사귀고,그렇지 않은 친구는 친한 친구로 사귀 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세상에서 가 장 인연이 깊고 가장 가까운 부모형제에게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남인 친구에게 잘 하는일이야진실한행 위일 수 없다는 이유에 서였습니다.진실이 아 닌 마음이나 행위는 반 드시 탄로나기 마련이 어서 언젠가는 배반하 는 친구가 되고 말 것 이라는 이유에서였습 니다. 귀양살이 시절, 이미 다산의 부모는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자신이 부모에게 하는 일은 언 급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먼 바닷속 흑산도에 서 귀양살던 둘째 형님 약전과의 관계는 자주 언급합니다. 두 분 사이는 ‘형제지기(兄弟知 己)’라면서 학문과 사상도 같은 수준임을 강조 하면서참으로사이좋은형제임을누누이강조 했습니다. 효와 제에서 제는 실천하고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오래 전에 KBS에서 이산가족 찾기운동을벌려몇십년동안헤어져살다가 만나는부모와자식,형제간의그기가막힌장 면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부모와 형제는 그렇 게 그립고 그리우며 반갑고 다정한 것입니다. 새삼스럽지만다산의효제사상을본받아다시 한번효제를생각하는시간이기를바랍니다. 효도와우애가그리운세상 박석무 다산연구소이사장 우리 한국은 불과 80여년만에 후진국에서 중진국을 거쳐 선진국이 된 세계 유일한 나리 이기에 세대간 특성이 크게 차별적으로 나타 나고 있다. 후진국 세대인 베이비붐세대는 6.25 전후세대,특히1955~1963년에태어난세대로서 1년에 120만명까지도 출생하여 대한민국의 산 업화와한강의기적을일궈낸세대이지만,지금 은거의모두가은퇴자의반열에들어섰다. X세대는 중진국 세대로서, 1970년대생들로 서대학에서는90년대학번으로서민주화운동 의 중심이었다. 지금은 50대 중반으로서 사회 적으로 대들보 역할을 맡고 있다.이들은 고도 경제성장기에 태어나서 자랐으며, 20대 때 정 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풍요를동시에누 렸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때 취업의 어려움 을 겪었고, 20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 으며양극화현상속에서삼포세대의시작점이 된 세대이기도 하고, 카드대란이나 하우스 푸 어문제의중심에섰던세대이기도하다. 앞의 베이비부머 세대는 성장기에 지게 지 고 농사짓는 시골에서 자란 세대였지만, X세 대는 현대 문화가 완전히 녹아든 사회에서 성 장했기에 신인류로 취급받는 경우가 많았다. 세대의 이름이 'X'가 된 것도 '도무지 알 수 없 는 세대'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명칭이다.오렌 지족도 이 세대였다. 여성의 경우는 대학진학 이보편화되었다.전체대학생입학생중여성 의 비율은 1980년 27.4 %로 1995년에는 42.5% 로 여성도 남성과 거의 비등하게 대학에 진학 하게된다. Y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로서 1980 년 초부터 태어난 사람 들로 컴퓨터와 전자기술에 아주 친숙한 세대 이다. 21세기의 주역이 될 세대라는 의미를 포 함하며밀레니엄세대혹은디지털세대로도불 린다.국제화와 정보화 및 컴퓨터와 인터넷 보 급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를 소유하고 즐기는 컴퓨터 문 화가일반화된첫세대로서정보탐색,구매,오 락, 게임, 메일, 커뮤니티 활동 등에 인터넷을 광범위하게사용한다. Z세대는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 에 걸쳐 태어난 X세대의 자녀들이다. 아날로 그와 디지털 문화가 혼재된 환경에서 자란 Y 세대(밀레니엄세대)와 달리, 어릴 때부터 디 지털 환경에 노출되어 자라난 디지털 원주민 (Digital Native) 세대이다. 컴퓨터보다 스마 트폰, 텍스트보다 이미지븡동영상을 선호한다. 아울러 관심사를 공유하고 콘텐츠 생산에 익 숙하며 문화의 소비자이자 생산자 역할을 함 께수행한다. MZ세대(밀레니얼 Z세대)는 1980년도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태어난 Y세대와 Z세대를 함께 지칭한다. 생각도 일하는 방법도 노는 방 식도 윗세대인 베이비부머나 X세대와는 전혀 다르다.그야말로 신인류이다.왜 이런 일이 벌 어진 것일까? 1980년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의 신자유주의 시작이고 한국사회에 민주화운 동이 고조되는 시기였으며,앨빈토플러의 '제3 의물결'이나왔다.1995년에는마이크로소프트 의윈도우즈95가나오면서퍼스널컴퓨터에의 한정보화사회가본격적으로시작되었고,2007 년에는아이폰이라는스마트폰이출시되었다. 기성세대는 컴퓨터가 업무용이었지만 이들 은 노트북이 생활도구이고 오락도구다. 공부하 고노는방식이다르고대화하는방식이다르니, 윗세대와말이안통하고문화적충돌도많다.그 러나 새로운 도구와 무기로 무장한 신인재들이 고, 민주화의식이 강하고 팀웍보다 개인주의가 강하기에정의공정평등에민감하지만,심리적 안전감만주어진다면일추진은확실하다. 세대는 2010년대 초반부터 탄생한 신세대 이다. Y세대의 자녀들이다. 이들은 노트북이 나 스마트폰이 아니라 5G AI 빅데이터 로봇 드론 메타버스 등이 생활도구이고 경쟁무기 다. 이들은 유아기부터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에 스마트폰 이전 문화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 고 특히 아날로그 매체와의 어떠한 연결점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 디지털세대다. 한국의 앞 날이 이들 세대인데, 문제는 저출산이다. 세 계주도국가로 도약해야 하는데, 출생이 적다 보니그점이애로다. 한국사회후진국(베이비붐세대)중진국(X세대,Y세대,Z세대)선진국( 세대) 박승주전여성가족부차관 책을 햇볕에 쬐어 말리던 날 저녁,다섯 살에서 열 살까지 갖고 놀던 것들을 모아 둔 상자를 찾아 냈다.모지라진 붓,부러진 먹,먼지 쌓인 구슬,새 의 깃털,등잔 장식,송곳 자루,바가지로 만든 배, 싸리나무로만든말따위가책상높이만큼이나나 왔다. 때로는 좀벌레 사이에서 기와 조각이 나오 기도 했다.이것들은 모두 이 손으로 가지고 놀던 것들이었다.서글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았지만 갑자기 옛날 사람이 된 듯하였다. 오늘의 성장한 내가 놀랍기도 하고, 옛날이 세월이 지나며 변했 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손바닥만 한 책도 10여 권 있었다.『대학(大學)』『맹자(孟子)』『시경(詩經)』 『이소(離騷)』 『진한문선(秦漢文選)』 『두시(杜 詩)』 『당시(唐詩)』 『공씨보(孔氏譜)』 『석주오율 (石洲五律)』은 내가 손수 비점(批點)을 찍은 것 인데, 모두 흩어져 완질(完帙)이 아니었다. 그중 『맹자』는 네 권으로 나누어 엮었는데, 역시 한 권 이빠져있었다. [원문] 쑨書之夕, 有自五歲至十歲吾遊戱之 . 凡禿筆븡敗墨븡埋珠븡落羽븡燈之飾븡錐之柄븡瓠舟븡杻 馬之屬, 與案齊, 往往瓦礫出亮 魚中, 皆此手之所 摩弄也. 非愴非歡, 忽如舊人. 訝今日之長成, 悟昔 日之變歷.卷如掌者什餘,『大學』븡『孟子』븡『詩』븡『離 騷』븡『秦漢文選』븡『杜詩』븡『唐詩』븡『孔氏譜』븡『石洲 五律』,自批,皆散不完.『孟子』分爲四,亦亡其一. -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정유각문집(貞 찮 閣文集)』 권1 「열유시소서맹자서(閱幼時所書 孟 子 )」 [해설]박제가는어느날집안에있는책을다꺼 내어말리다가창고한구석에서상자한개를발견 하였다.그상자에는그가어릴적가지고놀던잡 동사니들이빼곡히들어차있었다.그는잡동사니 들을 하나씩 꺼내 살펴보며 자신도 모르는 새 감 회에 젖어 들었다.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 것 이다. 상자에든잡동사니속에는박제가가손수베껴 적은 한 무더기의 책들도 있었다.여러 권의 책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네권 중 한권이 없어지고세 권이 남은『맹자』책은그에게 어린시절의 추억 을불러일으켰다.박제가는어릴적부터글씨쓰 기를 좋아하여 붓을 물고 다니며 여기저기 닥치 는대로글씨를써댔다고한다.7살때집의벽에 이미 하얗게 남아있는 곳이 없을 정도였기에 그 의 부친 박평(朴坪)은 매달 종이를 내려주었는 데, 그는 자기의 손가락 두 마디만 하게 종이를 오려 책을 만들고 책을 베껴 적었다고 한다. 이 렇게만드는책들은그가자람에따라점점커졌 고, 이웃의 벗들이 빌려 가고 몰래 갖고 가는 통 에 군데군데 이가 빠져버렸다.그의 『맹자』책은 그가 아홉 살 때 엮은 것이었고, 이 시기에 그가 베껴서엮은책들은이미책상자를가득채우고 있었다. 박제가의『맹자』책은그가자신의어린시절을 더듬을 수 있는 마지막 책이었다.그는 11살 때부 친을 여의어 더 이상 책을 만들 형편이 되지 않았 다.이사를 자주 다니느라 이미 만든 책들도 대부 분 잃어버렸다. 그는 『맹자』 세 권을 가져다 잘못 쓴 글자를 고쳐 쓰고 잃어버린 부분을 채워 넣고, 장정도말끔히새로하고는말했다. 이 또한 나의 벗이니, 벗은 벗으로서의 우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 안타깝구나, 작은 책을 매느라 글자의 뿌리가 잘려나갔구나![此亦吾之故也, 故 者毋失其故可矣.惜乎,幅短刀낫 字根!] 그는 자신의 어린 날을 더듬을 수 있는 『맹자』 책을 자신의 벗이라 일컬었고, 벗과의 우정을 함 부로저버려서는안된다는공자(孔子)의말을인 용하며, 지금은 자신이 어린 시절 베껴 쓴 『맹자』 책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정성 들여 장정하게 된 까닭을밝혔다. 그렇다면박제가는왜이미잡동사니가되어버 린『맹자』책을보고감회에젖어들었을까?어린 시절 베껴 쓴 『맹자』 책은 지금 보기에는 글씨는 삐뚤빼뚤한 데다 군데군데 빠지고 틀린 글자투 성이이며 크기는 겨우 손바닥만 하다. 조악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그에게 지나간 세월과 변해버린 자신을 새삼스레 느끼게 하였 을 것이다. 엉망인 글씨와 숱한 오탈자들은 보기 괴로울 정도였겠지만 어린 시절 자신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조그만 붓을 들고 구슬땀을 흘려가 며 베껴 썼을 모습을 상상하면 한편으로는 대견 하고 기특하였을 것이다. 또 당시에는 나름대로 적당한 크기라고 생각해 만들었을 책의 크기가 이제는 겨우 손바닥 만한 것을 보면 어느새 세월 이 이렇게 지났나 싶기도 할 것이다. 만약 지금 『맹자』를 베껴 책으로 엮는다면 큰 종이에 틀리 거나 빠뜨리는 글자 없이 단정한 글씨로 또박또 박 옮겨 적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그는 굳이 『맹자』를 새로 베껴 책으로 만들 생각을 하 지 않는다. 이미 암기하여 머릿속에 들어있기도 하지만,무엇보다도 어린 시절 누가 시키지 않아 도 즐거워서 스스로 글을 베끼던 열정이 어느샌 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보다 지적으로 나 신체적으로나 월등해졌지만 이 열정만은 되 찾을수가없다.그는『맹자』책에서어린시절열 정이 가득하던 자신을 발견하는 동시에 지나온 세월 속에서 열정이 식어버린 자신을 발견하였 을 것이 아닐까. 필자도근래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적이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 박사 과정을 수료한 지 9년 만의,기나긴 방황 끝의 졸 업이었다. 컴퓨터로 졸업을 위한 행정적 절차를 처리한 뒤 잠시 컴퓨터를 뒤적이다 오래전에 썼 던 석사논문을 발견하였다. 중간중간 넘겨 가며 읽어보았다.묘한 느낌이 들었다.지금 보기에 내 용이결코좋다고할수없었지만,논리를엮어가 고말을이어가려고고심한흔적,필자혼자만알 아볼 수 있는 그 노력의 흔적들이 새삼스레 감동 적이었다. 이 시절의 내가 열심히 산 것 같다는 생 각이 들어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 로 지금의 나는 그때의 열정을 잃어버린 것 같아 서 열정적이었던 그 시절의 젊은 한문학도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 시절의 나에게 부끄럽 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 다. 박제가나 필자의 경험처럼, 옛 추억이 담긴 물 건들은지금객관적으로보기에는별것아닌하찮 은 물건인 경우가 많지만 종종 새로운 감동을 주 곤 한다.어떤 경우에는 잊고 있었던 추억을 떠올 리게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하여 새로운 다짐을 하게 하기도 한다.독자 여러 분도 한번 추억이 담긴 물건을 꺼내서 그 시절의 자신과마주해보는것은어떨까. /임영걸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대동문 화연구원연구원 [본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메일링서비스를 통해받은것입니다.] ■고전산문 븣 어린시절베껴쓴븮맹자븯책에서발견한나 중고시절 역사시간부터 상당히 궁금했 던게있었다.몇번역사선생님에게물었 던 적도 있다.하지만 속시원이답을받았 던기억은없다. 우리는 태정태세문단세븣와 같이 왕의 순서를 외워 왔다. 후세에 왕들을 부르는 명칭을 임금이 죽은 뒤 종묘(宗廟)에 신 위를 모실 때 정하는 존호(尊號)로 묘호 (廟號)라고한다. 묘호에는 宗과 祖두 가지가 있다.임금 이 생전에 행 하였거나 이루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묘호가 붙여진다. 뒤에 조가 붙 는 경우는 나라를 세운 임금이나 다스리 던 시기에 외국 침략을 받았거나 내란이 생겨서 그 위기를 잘 넘긴 임금에 붙이는 묘호다. 종은 그와 반대로 태평성대를 이루거 나 큰 업적을 이루었던 임금에게 붙이는 묘호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이 편찬한 한 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대체 로 나라를 처음 일으킨 왕이나 나라의 정 통이 중단된 것을 다시 일으킨 왕에게는 祖를 썼고,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에 게는宗을붙였다고했다. 그리고 뒤에 군 이 붙은 연산군, 광 해군은 둘 다 신하 들에 의해 왕위에 륍겨나 왕의 묘호 를 받지 못했다. 그 래서 왕이 되기 전 에 불리웠던 명칭 을 그대로 사용했다. 왕의 기록인 조선왕 조 실록에서도 연산군과 광해군은 실록 이 아닌 일기로 표현 한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의 경우 자신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 가 드물었다.태명을 가지고 있고,어릴때 는아명,성인이된이후에는호를사용하 고 다양한 이름을 대신하는 별호가 있었 다.이들이름을직접부를수있는사람은 임금과스승,부모뿐이었다. 양반이 그럴진데 임금은 더욱 자신 이 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외국에 서신을 보내는 경우에만 사용했고 평상 시는 이름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 만 왕들 모두 이름은 있었다.정조도 이산 이라는 드라마로 정조 이름으로 알게 되 었다. 왕족들은 이름을 외자로 쓰는 것이 원칙이다.태조 이성계,태종 이방원 경우 는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 태어나 왕족으 로태어난 게 아니다.그래 서 이름이 외자 가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임금 묘호는 반드 시왕사후에그왕업적을바탕으로만들 어지게 된다.그래서 왕이살아있을 때 현 직왕에게는조나종을사용하지않는다. 왕이 생존해 있을 때 보통 신하들이 왕 을지칭할때에는금상,전하,또는주상이 라고 불렀다.그래서 생존해 있을 때 왕들 은 자신 묘호가 무엇이 될지, 조가 될지 종 이될지전혀알수가없다.세종대왕의정 식 묘호는 븮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 왕븯이다.너무나도길어서앞에두글자를 따서 세종이라고 한다. 하지만 세종이 지 금태어나서븮세종븯하고부르면전혀알아 듣지못할것이다. 사실 이런 묘호는 중국 방식을 도입해 왔는데 원조인 중국은 나라를 세운 태조 에게만 조라는 묘호를 쓰고 나머지 왕은 모두 종으로 하고 있다.그래서 조와 종은 엄밀히 말하자면 조가 더 높다.그런데 조 선 27명의 왕중에서 조를 사용하는 왕은 7 명이나있다.태조,세조,선조,인조,영조, 정조, 순조 이렇게 7명이다. 그리고 두 명 의군이있는데연산군과광해군이다. 태조는 나라를 건국했으니 당연히 조 를써야겠지만나머지6명은왜조를썼는 지 의아하다. 세조는 조카 단종을 몰아내 고 왕위에 올라서 단종 시절 문란한 국정 을 바로잡았다고 하여 조의 묘호를 사용 하게되었다. 조선 최악의 왕으로 평가 받는 선조와 인조는 우리 지금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선조는 임진왜란을 극복했다고 하여 조 라고 했다. 인조는 폭군 광해군을 몰아내 고 병자호란을 극복했다고 하여 조라는 묘호를쓴다.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별 웃 기지도않은코미디같은일이다. 그리고 영조와 정조 그리고 순조는 당 시그시대에이렇다할전쟁도없었고국 가적 큰 위기도 없었다.그런데도 조를 써 서 앞서 말한 조와 종의 차이 의미를 무색 케 한다.그리고 우리를아주헷갈리게 하 고 있다. 원래는 영종, 정종, 순종으로 묘 호가정해졌다. 그런데 후대 고종황제가 영조와 정조 가 자기 직계조상이라는 이유로 영종과 정종을 영조,정조로 바꾸었다.순종 역시 강화도령 철종이 자기 빈약한 왕의 정통 성 강화를 위해서 순종을 순조로 바꾸었 다. 이렇듯 당시 왕들은 묘호 중에서 종보 다는 조를 사용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아들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조를 사용하 기를 원했다. 하지만 지금 시각으로는 조 선의 가장 위대한 왕 세종대왕이 종으로 부르는 것처럼 조와 종 차이는 원래 의미 와는별관계가없이되어버렸다. 참고로 신라 왕 가운데 묘호를 쓴 이는 태종 무열왕밖에 없었다.고려 때는 태조 왕건만 祖를 묘호로 썼다.묘호는원래중 국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신라 무열왕 묘호를 태종으로 정하자, 당나라 고종이 시비를걸어왔다. 뷺너희 신라가 해외 작은 나라로서 태종 이란 칭호를 사용하여 천자 칭호를 참람 (僭濫)하게 썼으니, 그 뜻이 불충하므로 속히그칭호를고쳐라.뷻고했다. 그러나 삼국유사엔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위업을 이루었기 때문에 태종이 라고 썼다고 맞서 그 뜻을 관철시켰다고 기록돼 있다.그러나 신라 다른 왕들은조 나 종이라는 묘호를 쓰지 못했다.그냥왕 으로 표현했다. 신라초기에는 왕으로도 안쓰고차차웅,이사금,마립간등호칭을 썼다. 그러면 고려와 조선시대에 어떻게 이 런 묘호를 쓸 수 있었을까?고려 전기,중 국은 송, 요, 금이 서로 각축하면서 절대 패자 (覇者)가없었기에고려가황제를일 컬을 수 있는 국제 환경이 조성됐었다.그 러나 원나라에 항복한 이후에는 충렬왕, 충선왕, 공민왕 등으로 조와종 묘호를 쓰 지 못했다.그래도 공민왕 때부터는 충 자 는 뺐다. 원래는 원이 원나라에 충성한다 는표현으로왕앞에충자를꼭붙이도록 했었다. 조선은 중국의 충실한 제후국임을 표 방했으나 때로 중국 협박을 받아가면서 도 묘호만은 그대로 유지했다. 중국에 조 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제후국이면서 도 내부적으로는 자존 의식을 키우는 이 중성을지니고있었다고말할수있다. 사대(事大)와 자주(自主)의 교묘한 줄 타기였던셈이다.하지만오랜역사기간동 안묘호마저도우리마음대로쓰지못하고 중국 눈치를 보아야만 했던 작은 나라의 설움이더큰우리역사의아픔이다. 조선 왕 묘호 祖 와 宗의 차이 박 철 홍 뱚발뱞뱞행뱞뱞인:박순구 뱚취재편집:박상섭 뱚경영지원:박영일 기사제보븡광고신청븡구독안내 대표전화(053)588-7300 FAX(053)581-0067 뱚구독료년40,000 입금계좌:농협453013-55-000691 예금주:한빛신문 뱚뱜 42612 대구달서구달구벌대로1221(이곡동538-2)성창B/D5층 뱚뱜 본지는신문윤리강령및그실천요강을준수합니다 (2007년1월12일등록번호대구다-01225) 500만박씨성손의대변지 2007년1월24일창간(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