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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시고 기노소에 드시어 범장을 하사바드시었다. 26세 조 진사공 휘 명희는 공의 조부요 조 고 휘 기우는 화서 이항로의 문인이다. 고 휘 允奭(윤석)은 중암 김평묵과 성재 류중교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의암 류인석 선생과 함께 창의하시었다. 시조로부터 공에 이르기까지 누대에 걸쳐 혁혁한 공훈으로 충효의절이 조야에 널리 찬송되었다. 공은 단기 4202년에 서울 강동구 고덕동에서 출생하니 천품이 의연강직하고 명민하여 일찌기 성재 유중교 선생과 의암 류인석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서는 물론 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시니 학문과 덕행이 一郷(일향)의 이망이었다. 한말에 국운이 기울어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할때 을미사변으로 閔后(민후)가 시해되자 이에 격분하여 강호사림과 함께 제천 충주 원주 지방에서 창의하여 구국운동에 적극 활동하고 류인석 선생과 같이 만주로 가서 항일운동에 투신 활약하였다. 류인석 선생이 순국하시매 크게 애통하고 귀국하여 국내 동지를 규합 군자금 조달 책임을 맡아 의병활동에 크게 공헌하시었다. 의병사서인 昭義新編(소의신편) 8권 척화거의사실대략 사류동의자 명단에 부자가 함께 수록되었으니 계계승승 애국충절의 聲譽(성예)가 향당에 떨치었다. 이제 여생을 후진양성에 힘쓰기로 결심하고 청주 용암동 이정골에서부터 시작하여 가덕면 시동리 옥천 월외 지방 등 여러 곳에 초빙되어 훈학하시고 말년에 보은군 마로면 오천리에 정착하여 유망한 棟樑(동량)을 양성하는데 일심전력 한 몸 바치시었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시어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고저 항의하여 진충보국하시고 후학을 길러 육영의 덕행 남기시니 그 遺芳(유방)이 천추에 빛나리. 단기 4249년 7월 21일 향년 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