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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창선생 약술. ..전략..1900년 간재 전우선생이 부안 변산 월명암에서 강회를 열었을 때 16세의 소년으로 참가하여 백여명의 선비들 중 우뚝하니 간재선생이 크게 경탄하여 특별히 물어본 후 귀로에 창동을 왕방하여 격려하였다. 이해 10월에 천안 금곡으로 선생을 찾아가 뵙고 집지(제가가 스승을 처음으로 뵐때 폐백을 가지고 감)의 예를 거행하고 학문의 대도에 들었는데 이떄 후창이라는 호와 함께 창동거사라는 수필대자를 함께 받았으며 1904년에는 전주향교 명륜당에서 간재선생을 모시고 큰 강회를 열었다. 1905년 22세. 3월부터 연재 송병선선생을 고암서원, 영주정사, 도계서원등에서 누차 모시고 강학을 하였으며 10월에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식음을 폐하고 통분하였다. 1906년 23세. 이때 면암 최익현이 태인에 머무르며 창의의 군을 모을때 그의 충의지의를 위로 격려하는 간재선생의 편지를 가지고 찾아뵈었다...중략... 안중근 의사의 의거 소식을 듣고는 찬양의 글을 지었으며 1910년 경술국치에 이어 동문 박병하(朴炳夏)의 순의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 1912년 29세. 간재선생이 도해지의로 계화도에 입도하시매 선생을 모시고 학문을 닦으며 선생의 사고 편교에 힘썼다. 1915년 32세. 일제가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그들에게 배타적이고 항일적인 명망있는 선비집을 골라 이른바 상사금과 은사배를 줄때 이를 받으라고 강요하니 이를 질척 거절하였으며 또 큰 아들이 왜놈들 일어학교에 입학시킬것을 요구하며 단호히 배척하니 저들의 핍박이 날로 심하였다...중략... 1925년 41세. 동문인 석농 오진영이 스승의 유지를 무시하고 간재사고를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발간할때 여러 동문의 선봉이 되어 그가 선생의 뜻을 저버리고 무함하는 죄를 적극 성토하였다. 이 때문에 배일당으로 지목되어 전주검사국에 수차 호출되었고 일차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였다. 광북 후 스승의 수정본 문집을 발간하였다...중략... 1945년 8.15광복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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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하(朴炳夏: 1847 ~ 1810, 전남 광양, 1995년 애족장 서훈)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함에 통분을 못이기어 단식 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