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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11월30일 수요일 12 (제191호) 기획 효자박응훈선생에대해서는그동안몇번소개를한적이있다.최근충북영동군에서는효자박응훈선생의 효를본받고생태관광확대및건강한 여가문화증진을위해‘노천효자길탐방로’3.65㎞를5억원의사업비로개설지난3일준공식을가진바있어효 (孝)사상고취와함께문중에서는 호 랑이석상(石像)을세워효자와함께한호랑이를기리고있다.호랑이는한국인에게가장친숙한동물이다.예 로부터조상들은호랑이가액을물리 고 복을 부른다고 믿었다.이 때문에 매년 정초가 되면 궁궐을 비롯해 민가에서는 대문에 호랑이 그림을 붙였 다.민화·전설·구전설화에 호랑이가 자주등장하는것에도이런배경이깔려있다.명나라와청나라에서는호랑이이야기로가득한조선을‘호담국 (虎談國)’이라고불렀을정도다.그만 큼호랑이와관련된다양한명소들이여행지로주목받아왔다.조선조1540년(庚子)에충북영동군매곡면에 서태어난오촌선생은아버지가병석 에눕자약을구하러한밤중에 100리가넘는길을나섰다.백화산을넘어경북상주쯤다다랐을때갑자기집 채만한호랑이가그의앞에나타났고 호랑이등에올라탄오촌은무사히약을지어집에도착했다.이후에도오촌은멀리약을지으러다닐때마다 항상호랑이와동행했다고한다.오촌 의효심으로그의아버지는92세까지장수를누렸다.전래동화에서나나올법한이이야기는실화를기반으로 하고있다.충주박씨집안의야사호총 실기와조선시대황간현의역사를기록한황계지(黃溪誌)에는오촌과호랑이에대한내용상세히기록돼전해진다 .소문은당시조선왕실에전해졌고선 조는1601년‘효자오촌박응훈지려’라는편액(정려)을하사했다.지금도오촌의후손들이400년넘게호랑이무덤 을정성스럽게돌보며매년오촌의아 버지기일에맞춰호랑이제사를지내고있다. 지난 10월 26일에는 정려 옆 노천효자길탐방로 입구에 호랑이 석상과 오촌 박응훈선생의 효행과 호랑이 공적비를 세워 제막식을 갖고 오촌 선생 과 함 께 한 호 랑 이 를 기 리 고 있 어 이 날 제 막 식 고 유축문을함께인용해본다. 『응훈 선조님 효자문 앞에서 후손들은 삼가 고 합니다. 선조님의 유적과 호랑이의 혼령이 깃들 어 있는 이곳에 머리 조아리고 있는 우리 후손들 의 가슴은 선조님의 지극한 효심에 대한 벅찬 감 격과 공경심으로 크게 요동치고 있습니다. 그러 나 한편으로는 그동안 선조님에 대해 무관심과 안일한 태도로 살아온 우리들의 불효가 너무 크 기에 차마 고개를 들 수 가 없습니다. 이제야 이 부끄러운 고백과 함께 크나큰 재해에 대한 사죄 를 동시에 올리옵니다. 그리고 늦었지만 이곳 효 자문 옆에 선조님의 공적비와 석물 호상을 갖추 어 제막식을 거행함으로써 선조님의 효심을 이어 받고자 하오니 선조님께서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또한 영동군에서는 선조님의 효심에 감복하여 효 행을 함께한 호랑이와 선조님의 효행을 기리고자 효자길 탐방로까지 조성하였을 뿐 만 아니라 효 행 테마 길도 조성하여 학생들에게 효심의 교육 장으로 활용한다고 하여 삼가 고합니다. 이제 오 늘 기회로 우리 후손들은 선조님을 받드는 효행 에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선조님들의 호국안 민 정신과 업적을 드높이는 현양사업에도 더욱 정성을 바칠 것을 후손들은 굳게 다짐하고 있습 니다. 먼 곳에서 굽어 살피시고 계신 선조님과 호 랑이의 혼령이시여 바라옵건대 앞으로 우리들이 선조님의 후손다운 인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올 바른 정신을 보장시켜 주시어 각자 맡은바 소임 을 다 할 수 있 도 록 큰 힘 과 지 혜 를 내 려 주 시 고 보 살펴 주시옵기를 간절히 기원 드리며 삼가 간소 한 제수를 차리고 의식을 갖추어 제사하오니 강 림하시어 흠향 하시옵서소 충주박씨 강릉공 14대 손계영외후손들은삼가고합니다.』 호상 건립과 오촌 박응훈선생의 효행과 호랑이 공적비 건립은 후손들의 강한 숭조정신과 효행을 본 받 으 려 는 정 성 이 깃 든 것 으 로 효 자 집 안 에 효 자난다는설을입증한것같다. 이날 제막식은 계원 현종이 헌관으로 헌작 하 였으며, 상구, 철기 현종이 우집사와 좌집사를 각 각 맡았다. 그리고 병호 현종이 경과보고를 우숙 회장이 비문을 낭독하였고, 봉기 현종이 우숙회 장과관계자들의노고에차하의인사말을했다. 한편 충주박씨 강릉공 후예들은 선조 제향 후 에 반드시 정성스럽게 제물을 차리고 400년 넘게 호랑이의제사를지내왔다. 아! 이곳의 정려는 충주박씨 효자 박응훈 선생 (1539~1590)의 정려이다. 선생은 청백리이자 효 자이고, 타고난 애민정신으로 선정을 베풀어 일 세의 사표가 된 강릉공(휘 효함)의 증손이고 청 주목사를 지낸 소촌공(휘 성건)의 아들 칠형제 중여섯째이다. 효자 박응훈 선생의 지극한 효심에 호랑이도 감복(感服)하여 100리가 넘는 옥천읍내에 있는 조약국과 경북 선산에 있는 이 약국을 오고 갈 때 선생을 등에 태워 다녔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소 촌공의 묘 자리를 오공입지형(蜈蚣入地形)의 길 지에 잡아주었고, 선생이 시묘(侍墓)에도 오롯이 함 께하 였다 . 그 러나 범 도 명이 있어 무 주 덕유 산에 서 죽으 니 선생 은 호랑 이의 유 해(遺骸)를 수 습하 여 범이 놀던 자리에 묻어주었으니 바로 영동군 황 간면 소계리(小溪里) 산49-5번지 소촌공(邵村公) 의 유택(幽宅)앞이라 그곳을 호점산(虎占山)이라 하고 범의 무덤을 호총(虎塚)이라 이름 하여 표석 을세우고매년음력10月11日소촌공묘사후주육 (酒肉)등 제수(祭需)를 진설(陳設)하여 범의 절덕 (切德)을오늘날까지기리고있다. 효자 박응훈 선생은 1601년(선조 34) 정려(旌 閭)를 받았으며,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 三綱行實圖)에 오르고, 황간(黃澗)의 송계서원 (松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선생의 효행은 조선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조선 시대의 정치·사회·문화를 기사본말체로 서술한 역사서 ‘연려실기술’, 충청도읍지(1684, 숙종10) 등에도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으므로 효자 박응훈 선생의 효심에 호랑이가 감복하여 동행한 상세 내용을 알고자 하는 이는 위 서책에 상세하게 기 록되어 있으니 참고 하시기를 바라면서 효자 오 촌 박응훈 선생의 효성을 본받고 효행을 함께한 호랑이를 기리면서 사회가 더욱 더 따뜻해지고 온 국민이 다 지극한 효자, 효부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뜻에서 효행정열(孝行貞烈)의 本이되고 있는 이곳 정문(旌門)에 호상을 건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서기2022년 11월 일 충주박씨 강능공 종회 회장 박우숙 공사원 :박 희진 재무 : 박병호 고문 : 우천, 계원 임원(영동 공):재원,철기,봉기,기원,임원(상주공):계영, 중노,상구,외강릉공,소촌공종원(후손)일동 노천효자길 탐방로는 충북 영동군에서 지난해 부터 총 연장 3.65㎞를 5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지 난11월3일준공식을가졌다. 효자길 출발은 시묘터와 호총이 있는 성주골에 서 출발해 탐방로를 따라가다 보면 반대골·장자 나무골·거저나무골·사발골 같은 이름만 들어도 아득한 산촌 마을을 지난다. 하나같이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풍경이 펼쳐질 것만 같은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탐방로는 지난 수 백 년간 사람이 다니던 길을 연장하는 차원이라 걷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탐방로 종점은 충 주 박 씨의 재실 봉유재(奉裕齋)다. 재실 앞으로 는 대형 호랑이 조형물이 엎드린 채 마을을 지키 고 있고 400년 전 왕이 하사한 ‘효자오촌박응훈지 려’편액이걸린효자문도그대로다. 탐방로를 걸으며 선생의 효행과 호랑이의 행적 을 더 듬 어 보 며 힐 링 을 할 수 있 는 좋 은 기 회 가 될 것 으 로 자 녀 들 과 함 께 하 면 더 욱 좋 을 듯 싶 다 . 오촌공은 영천부사를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 判)에 증직된 아버지 휘 성건(成楗)으로 어머니 흥덕장씨(興德張氏)와의 사이에 7남 2녀중 여섯 째 아들로 1540년(庚子)에 충북 영동군 매곡면에 서 태 어 났 다 . 자 라 나 자 송 당 박 영 선 생 에 게 사 숙 (私淑) 했는데 학문에 독실하고 행실을 도답게 하며 재예(才藝)가 초월하여 시(詩)는 성당(盛 唐)을 사모하고 글씨는 종왕(鍾王, 魏鍾뮬과 晋 王羲之)을 본받으며 그림에도 공부하여 사림들 이 삼절(三絶)이라 일컬었다. 부모님 섬김을 지 극한 효로 다하여 조부 장사랑공과 아버지 소촌 공에이은3대효자로태어난것이다. 이조 중종 때 옥천군수(沃川郡守)와 영천부사 (永川府使)를 지낸 소촌(邵村) 박성건(朴成健) 은 문간공(文簡公) 눌재 박상(訥齊 朴祥)에게 사 사(師事)하고송당박영과교우(交友)하며고봉기 대승 선생과 삼종조(三從祖)문충공(文忠公)박순 (朴淳, 선조 때 領相)과 도의지교(道義之敎)를 강 론(講論)하며 지낼 때 장씨부인 일야몽중(一夜夢 中)에 한 노 인으 로부 터 잉어 일 곱 마 리를 얻 어 첫째 는 봉황새(以鳳) 둘째는 황룡(黃龍, 以龍 義兵將) 셋째는기린(以麟)넷째는범(以虎)다섯째는오색 구름(以雲)여섯째는 선동(仙童,應勳 -孝子)일곱 째는 청조(靑鳥, 以鸞)가 되는 꿈으로 얻은 칠형제 를거느리고살았다.소촌공(邵村公)의노모(老母) 가80세가넘으니봉양(奉養)을위하여영천부사를 사임(辭任)하고 황간(黃澗)땅 내동(內洞)에 정주 (定住)하셨다.이후농부와어흡(漁翕)으로한가하 게 지내던 경오년(庚午年)가을에 우연히 득병(得 病)하여환후(患候)가위중(危重)하시니칠형제가 사방으로 구약시탕(求藥侍湯)하였으나 효험(效 驗)이 없고 잉어 드 시기 를 원하 므로 엄동 (嚴冬)에 얼음 을 깨고 잉 어 구하 기에 며 칠을 헤 매던 어 느 날 새벽 오촌 응훈(梧村 應勳)이 냇가로 나가 잉어를 잡기를 지성(至誠)으로 기도(祈禱)하고 얼음을 깨 는 찰라 난 데없 이 얼음 깨 지는 소 리가 나 더니 잉 어 한 마리가 뛰어 올랐다. 소원(所願)하던 잉어를 드 리니환후(患候)가쾌유(快愉)하셨다. 그런 후 오래되어 소촌공이 대소변(大小便)이 불 통(不通)하는 환후(患候)로 형제 7인이 태산(泰山) 같은 걱정을 하던 중 상주읍내(尙州邑內) 조약국이 의술(醫術)이 고명(高明)하고 이런 병에 특효약을 제조한다는 소문을 듣고 오촌(梧村)이 약을 구하러 가기를 앞장서 서둘러 등촉(燈燭)을 밝히고 술시 초 (戌時初, 저녁일곱시경)에 출발하니 초겨울 날씨가 이미 어두워졌다.방단이 강변(江邊)에 이르니 큰 범 이가는길을가로막고꼬리를치며눈에서는불빛이 환하다 梧村은 뷺나는 지금 친환(親患)이 위중(危重) 하여약을구하러가는길인데네가어찌길을막느냐 빨리비켜라뷻고호통을치니호랑이는꼬리로제등을 두드리면서 타라는 시늉을 하므로 梧村이 뷺네 등에 타라는 말이냐뷻하니 머리를 끄덕끄덕하므로 호랑이 를타고양손으로범의갈기를단단히붙잡고 달려가 니 비룡 비호 (飛龍飛虎)란 말대 로 순 식간 에 상주 읍 내에당도하여조약국을찾으니깜짝놀라며뷺황간 (黃澗)이 거리가 백리가 넘은데 밤중에 어떻게 왔 으며도저히못가니자고가시오뷻라고권한다.梧村 이 범 을 타고 온 사실 을 이 야기 하니 뷺출천 지대 효자 (出天之大孝者)뷻라천신이감응(感應)하고금수가 감동 하였 으니 고 금천 하(古今天下)에 처 음 보 는 일 이라고 칭찬(稱讚)을 아끼지 않았다. 길가에서 기 다리 던 범을 타고 돌아 오니 날 도 새 지 않 은 이 른 새 벽이라 집안상하가 영문도 모르고 놀라며 시탕진 음(侍湯進飮)하여 소촌공을 소생(蘇生)시켰다. 이 사실은 인근(隣近) 마을로 퍼지고 원근사우(遠近 思友)와 근읍사림(近邑士林)들의 간병행렬이 연 락부절(連絡不絶)이었으며 오촌의 효행을 칭송 (稱頌)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사실이면 범 을 구 경할 수 없 느냐 는 간 청(懇請)에 오촌 은 술 안 주를 마련하여 뒷산으로 친구들을 모시고 대접(待 接)하면 서 큰 소 리로 뷺범아 범 아뷻하고 부르 니 미쳐 세 마디 소리 가 끝 나기 전 에 범 이 나 타나 서 梧村 곁 으로 다가와서 꼬리를 흔들고 옷자락을 핥으며 반 가워 하다 가 곁에 쪼 그리 고 앉으 니 그 모 습이 엄 숙 (嚴肅)하고 무서워서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좌 중(座衆)은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모두기절(氣 絶)하여범을물리기를간청하므로하는수없이개 한마리를 내어주어 돌려보냈다.1-2시간 후에야 기 절한 좌 중이 제 정신 을 차리 고 梧村의 지 극한 효 성 을칭찬하였다고한다. 또 몇 년 후 부 친 (父 親 )이 노 령 ( 老 齡 )으 로 고 생 하실 제 이번에는 선산(善山)이 약국 약이 효험( 驗)이 있을 거라는 공론(公論)에 이른 새벽에 출발하려하니 마을 앞 숲에서 범이 기다리고 있 다가 꼬리를 흔들며 타라는 시늉을 하므로 타고 서 약 을 구 해 오 니 혹 그 모 습 을 본 사 람 들 중 어 떤 이는 놀라서 기절하고 어떤 이는 감탄하며 칭송 아니 하는 사람이 없으며 이소문은 호서(湖西) 영남으로퍼져서공의효행을탄복하였다한다. 얼마 후 운명(殞命)에 다았을 때 오촌이 마지막으 로 왼손 무명지(無名指)피를 드렸으나 백약이 무효 로 선조사년신미(1571년)에 소촌공(邵村公)이별세 하니 때에 92세(歲)였다. 형제 7인이 초상범절(初喪 凡節)을극진히하고장지(葬地)를구하는데수십일 을지관(地官)과더불어헤매던어느날소계리(小溪 里)재에도달하니갑자기범이나타나서앞장서더니 산중에이르러앞발로땅을파고꼬리로땅을가리키 며梧村의옷자락을물고가므로뷺이곳이장지(葬地) 란 말이냐뷻물으니 끄덕끄덕하므로 지관(地官)이 산 형세를 살펴보니 오공입지형(蜈蚣入地形)이라 앞에 는 소계(小鷄) 금계(金鷄)가 십리 내에 있으니 대명 산 이로다. 지네가 닭이 없으면 무슨 힘을 쓰리오 천 작(天作)으로 두 마리의 닭이 있으니 백자천손(百子 千孫)에만대봉사지지(萬代奉祀之地)가분명하다하 므로1572년2月20일에그자리에장례(葬禮)를지내 고 묘 아래 여막(廬幕)을 짓고 梧村이 시묘(侍墓)를 살았다. 밤에는 범이 와서 같이 자고 추우면 범이 따 스한 털로 감싸주고 몸에 종기(腫氣)가 나면 혀끝으 로 핥아서 낫게 하며 조석상식(朝夕上食)때는 범이 같이 주선하고 꼬리로 아침이슬을 털고 눈을 치우고 낮에는산중에들어가사슴과노루며토끼꿩등을잡 아다제수(祭需)에쓰게하니마치종을부리는것같 이하였다.맏상주간은공(澗隱公)은집에서혼전(魂 殿)을 모시고 주문공의 가례(家禮)를 따라 집상(執 喪)하며 농사와 가축을 길러 매월 두 마리씩 개를 범 의 먹이로 주며 범에게 뷺너는 아우의 효성에 감동하 고 정성이 지극하니 너 보기가 부끄럽다뷻며 범을 위 로하였다. 시묘 3년을 마치고 하산하니 머리는 장발 이요온몸은쇠약(衰弱)해져서말이아니었다. 이 때 황간(黃澗)고을 신관(新官)이 도임(到 任)하여 고을 안 사정을 물을 적에 박 오촌의 효 행을 세세히 듣고 감탄하며 범 구경하기를 원하 고 오 촌 을 청 첩 (請牒)하므 로 범 을 타 고 가서 문밖 에 세우고 사또(使徒)께 인사하고 좌정(坐定)하니 오 촌을 극 구칭 찬(極口稱讚)한 후 범을 구 경하 고자 한다.오촌이 뷺범아 범아뷻부르니 꼬리를 흔들며 동 헌(東軒)마당에 들어왔다.사또는 뷺착한 범 이로고 어디짐승잡는시늉을한번해보아라뷻하니별안간 아우성 소리를 지르고 곤두박질을 넘고서는 으르 렁 거리며 달려드는지라 신관사또 방문을 닫고 방 구 석에 쓸 어져 기 절하 여 숨도 못 쉬 고 말도 못 하고 손만 허우적거리며 부들부들 떨므로 범을 물리쳤 다. 한 시간 후에 정신을 진정하더니 뷺십년감수는 했소뷻하면서 농물( 物)을 선사하며 효행을 칭찬 하고조정에장계(狀啓)를올렸다한다. 얼마후 오촌의꿈속에서범이나타나뷺지금옥천서 하산하다가함정(陷穽)에빠졌으니속히구해달라뷻고 하였으나꿈이라믿지않고돌아누워자는데뷺지체하면 나는죽으오뷻하며애원(哀願)하므로깜짝놀라형제칠 인을소리하여말을타고달려가니사람들이메워서서 포수가총에약을재고불을붙이는중이었다.오촌이손 을흔들어중지시키고살려주기를간청하니사람들이 영문을몰라웅성거렸다.전후사정을자세히이야기하 니 함정 문을 열고 범을 이끌어 올리니 고위(固 酬 )사람 들이놀라질겁하였다.범은공을보고반가워하며꼬리 를치며눈물을흘리니梧村은뷺집에서양식(糧食)을주 는데 왜 이곳에 와서 함정에 빠졌느냐뷻며 등을 어루만 져 주었다.급하게 오느라 돈 준비를 못했으니 이 표를 받고수일만참으면범의값을치르겠다고사정하니모 든 사람들이 뷺공의 범이 확실하니 어찌 값을 받으리오 염려 말고 가시오뷻라고 사절(謝絶)하므로 주효(酒肴) 를따뜻이대접하고돌아왔다. 범 도 명 ( 命 )이 있 어 몇 달 후 梧 村 의 꿈속에서 뷺지금 무주덕유(茂朱德裕) 산하를 지나다가 함 정에 빠졌소뷻하므로 형제 칠인과 하솔(下率)을 거느리고 말로 달려도 길이 백 여리라 도착 했을 때는 이미 범은 죽은 후였다. 고위(固 酬)에는 빽 빽이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다가 梧村이 범을 어루만지며 무한히 슬퍼하며 범 주인이란 내력을 이야기하고 범을 사겠다고 하니 뷺범의 주인이 있 다는 말은 고금에 못 들어 본일뷻이라며 가서 판결 을 내리자고 하였다.하는 수 없어 무주 원님께 고 발되어 원님 앞에 조사(調査)를 받았다. 원님은 사람을 시켜 황간 고을에서 자세한 내력을 조사 한 후 뷺황간 박 선생은 양호(養虎)하며 범을 타고 약을 구하고 묘지를 선(選) 하여 조석상식에도 같이하며 종과 같이 부렸다는 말은 들은 지 오래 이나 오늘날 비로소 만나 보게 되어 기쁘오뷻라며 무 한 히 찬 양 하 고 범 을 내 어 주 라 명 하 므 로 공 은 값을 厚하게 치르고 범을 운반(運搬)할 때 무주 원님은 역졸(驛卒)을 시켜 황간까지 운반하여 주 었으므로 범이 놀던 자리에 묻어주었다. 그곳이 바로 소촌공(邵村公)의 무덤 앞이요 소촌공 무덤 을 호점산(虎占山)이라하고 범의 무덤을 호총 (虎塚)이라 이름하여 비석을 세우고 매년 음력 1 0月11日 소촌공 묘사 후에는 주육(酒肉)등 제수 (祭需)를 진설(陳設)하여 범의 절덕(切德)을 기 리고 있다. 梧村은 오직 평생을 부모만을 위하고 시묘육년(侍墓六年) 동안 하루도 집에 내려오는 일 없이 묘를 떠나지 않고 한서(寒暑)를 견뎌서 몸이 쇄약해진 결과 향년 36세로 卒하니 호서사 림(湖西士林)이 조정에 상소(上疏)하여 1601년 (선조 34) 선조대왕이 특명하시어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고 친필로 「효자오촌박응훈지려(孝子 梧村朴應勳之閭」의 판액(板額)을 하사하셨으니 지 금 매곡 면 내동 도 로변 에 열녀 朴守玄의 妻 선산 김씨의 열녀문과 쌍정문(雙旌門)으로 세워져 이 고장효행정열(孝行貞烈)의 본이 되고 있다. 노천효자길탐방로와효자오촌 박응 훈 선조 유지를찾아븣 호랑이석상건립 오촌박응훈선생정려와호상,충북영동군매곡면노천리영동군향토유적제54호. 오촌박응훈선생의효행과호랑이공적비문 노천효자길탐방로 오촌 박응훈 선생 호총실기(虎塚實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