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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5월31일 화요일 12 (제185호) 기획 난계박종정선생은충효를함께한위인(偉人)으로평가한다.산과바다와호수가어우러진삼경(三景)속에예 (藝)와의(義)와차(茶)를두고 삼 보 향 (三 寶 鄕)이라하여삼경삼보향의고장으로알려진전남보성에서태어난선생은임진왜란에백의(白衣)로서공헌하 고정유재란에불행하게도왜적의흉악한 칼끝에유명을달리했다.그러나선생의논의와행실은후세까지영구히전해야할것이있다.이는첫째당론 (黨論,동서분당)에깃발을세우지않았으 며,국난에거의(擧義)를도왔고,상부(相府,의정부)에장수가될만한인재를천거하였고,창졸간에절효(節孝 )에죽은것이니명철(名哲)한삶은후세에 더욱빛이나겠다.할것이다.이에가정의달을맞아선생의삶을되돌아본다. 선생의 본관은 함양이고 휘는 종정(宗挺) 자는 응선(應善) 호는 난계(蘭溪)이다. 고려에서 예부 상서를 지내고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사에 추증된 상서공 휘 선의 후예이고 6世 내려와 제1파 군기 소감공 휘 지문(諱 之文)은 파조이다. 고려조 군 기소감(軍器少監)이고, 양(陽)·경( 궝)·순(淳) 삼형제를 두었는데 춘방시학을 지낸 차남 휘 경 으로 세계가 이어지는데 이후 홍저(洪貯, 典儀令 判東部錄事), 증손 검(儉, 書雲副正), 현손 득춘 (得春,別坐),득시(得時,중직대부 사복경 홍문관 교리지제교)모두현달하였다. 군기 소감공의 현손 휘 득시는 문과 급제하여 중직대부(中直大夫) 사복경(司僕卿)과 홍문관 교리(弘文館 敎理),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였 으며, 합천이씨와 결혼 아들 휘 선(鮮, 동정공)을 낳았으니바로선생의6대조이다. 동정공 휘 선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지제교 동정(同正)을 역임하며 명성과 덕망이 세 상에 크게 떨쳤으며, 세종23년(1441년) 졸하였 다. 슬하에 수지(遂智), 수화(遂和) 형제를 두었 는데 장남 휘 수지(遂智)의 字는 희안(喜安) 호 가 지봉(芝峰)이다. 세종3년(1421)에 출생하여 어머니를 지효(至孝)로 섬기고 제매(弟妹)를 어 루만져우애가지극했다. 사마시에 급제하고 감찰어사, 세자익위사 좌익 찬을 거쳐 예산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노모를 위 해 부임하지 아니하고 남평 현감으로 치적을 올 려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뒤에 문과에 올라 홍문 관 교리 지제교, 북평사 집의를 역임했다. 사후에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보성 유산사에 배향 되었 으며, 아들 오형제(이온, 이량, 이공, 이근, 이신) 를두었다. 청백리 휘 수지의 장남 이온(以溫)은 진사(進 士)시에 합격 후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으며,손자 휘 곤손은 갑산교수이고, 휘 후생(厚生, 敎授) 휘 인(認, 중추부사), 근(謹, 군자감정) 형제를 두었 으며 장남 휘 인(認)은 계공랑으로 학문과 행실 로 천거되어 해남과 동복의 훈도에 제수되었고 수직으로 통정대부 중추부사이고 천정(天挺)· 종정(宗挺)·시정(時挺)삼형제를두었다. 선생은 통정대부 중추부 사 휘 인(認)과 순천박씨 와의 사이에 명종11년 155 5년 10월 6일에 태어났다. 자질이 빼어나고 총명이 뛰어나 겨우 6세에 벽에 호 랑이를 보고 곧 시를 짓기 를 어 떤 사 물 도 보 이 는 게 없고(一物無所見), 한 걸 음도 나아갈 수 없구나(一 步不得行)이라 하였다. 이 시는 논어 양화(陽貨)편에 서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 를 교육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 남을 공부 하지 않 는다 면, 그 것은 마 치 담을 마 주 하고서있는것과같다.[人而不爲周南召南(인이부 위주남소남) 其猶正牆面而立也與(기유정장면이 입야여)]”하였다.이정장면이립[正牆面而立(정장 면이입)]이란 구절에 대해 주자는 “매우 가까운 곳 에나아가도어떤사물도보이는것이없고한걸음 도 나아갈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言卽其至近之也 (언즉기지근지야) 而一物無所見(이일물무소견) 一步不可行(일보불가행)]”라고 풀이하였는데 이 는 선 생의 어 릴적 시 와 같았 으니 논 어를 배 우지 않 은사람으로서매우이채롭다할것이다. 8세에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보기를 좋아하여 책 표지에 쓰기를 “제후의 죄악을 밝혔으니 아! 공자는 신성산 분이로다.”하니 부형들이 매우 기 특하게 여겼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겨서 진지 를 올릴 때에 뜨겁고 차가운 정도를 살폈으며, 곁 에서 모실 때에는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예절을 다하였다. 큰형 진사공 천정(天挺), 어린 아우 시 정(時挺)과도 우애가 지극하였다. 날마다 서재로 가서 역사책을 보았는데 즐거워하며 먹는 것을 잊었고, 날마다 수백 수천 마디의 말을 기억하였 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의 글과 주자의 자치 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즐겨 읽으면서 말이 달리듯 그 뜻을 꿰뚫어 미세한 곳 까지 비춰주지 않음이 없었거, 사람들이 물으면 곧 암송하여 의 심을풀어주었다. 나이 14~5세에 사마천(司馬遷)과 한유(韓愈) 의 여러 글을 가지고 송광산(송광사가 있는 조계 산)에 들어가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독 서만 하니 스님들도 두어 달이 지나도록 그 얼굴 을보지못하였다. 문장이 날로 발전하였고 사(辭)와 부(賦)에 능 통하여 전한시대 문인으로 자가 장경(長卿)이었 던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전한시대 유학자로 문 인인 자운(子雲, 字 揚雄)을 본보기로 삼아 바다 처럼 넓고 크게 펼쳐 한 때에 이름을 펼쳤다.사람 들이 과거에 응시하도록 권하기도 하고 또 어버 이의 분부도 있었기 때문에 애서 과거에 응시하 여 선조 병자년(1576, 선조9)에 사마방목(司馬榜 目)에올랐다. 동료들이 선생을 영예롭게 여기자 선생은 말하 기를 “내가 과거시험에 합격한 것은 구차하게 따 뜻함과 배부름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항상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에 보답하려는 생각을 가질 뿐이다.”하였다. 이로부터 더욱 뜻을 가다듬어 글을 읽었고 의리 를 살펴 밝혔으며 효도와 공손함을 돈독히 행하 였다. 오로지 자신을 위한 학문(爲己之學)에 마음을 두어서 소학(小學)으로 덕을 세우는 지름길로 삼 고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으로 표준을 삼 았다. 거처하기를 공손히 하고 일처리는 신중하 였으며남을응대할때에도모두법도가있었다. 선생은 본래 몸이 허약한 데다 힘써 학문을 연 구하느라 피로에 지쳐 병을 얻게 되어 결국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세상일을 끊은 채 오로지 생명 을 키우고 본성을 기르는 것을 업무로 삼았다. 평 소에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지산(芝山) 아래에 정사(精舍)를 짓고 스스로 난계(蘭溪)라 불렀다.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소나무를 심어 문 으로 삼았다. 날마다 그 사이에서 시를 읊조리고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며 유유자적하게 은자 (隱者)의 삶을 살면서 한평생 학문에 전념하는 장소로삼았다. 쓸쓸히 살아가는 담백한 삶을 남들은 그 근심 을 견디지 못하였으나 태연하게 대처하였다. 당 시에 호남 한 도(道)가 당론(黨論)으로 첨예하게 대립했으나 선생은 초연히 우뚝 서서 당론에 참 여치 않았기 때문에 시류를 륍는 무리들에 배척 을당하였다. 대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당이 나누 어진 뒤로 조야(朝野)에서는 오직 당시의 여론에 견강부회하여 충신과 현인을 모함하는 짓을 일삼 고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휴척(休戚, 기쁨과 슬 픔)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에 선 생은이를깊이통탄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동인의 정여립의 역모 사건이 일어나자 양천경(梁千頃)등이 도내 유생 들을 광주향교에 모아놓고 역적의 실상을 아뢰는 소장(疏章)을 올리려 하였는데 가까운 친족 중에 서참서코자한사람이있었다. 선생이이르기를“이번발걸음에불가(不可)한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양천경 등은 당론 으로 그 무리들에게 추대되었습니다. 이번에 아 뢸 소장에서 동인(東人)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들은 반드시 소장에다 끌어넣을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불가함입니다. 이발(李潑) 형제는 사는 곳이 가까워 자주 왕래하여 정의(情義)가 가장 친밀한데 그 소장에 참여한다면 옛 친구를 대하 는 도리에 어찌 부끄럼이 없겠습니까. 이것이 두 번째 불가함입니다.” 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오늘 가는 것은 그 과격한 당론을 막고자 함이니 내 말 을 듣 지 않 으 면 다 른 의 견 을 내 세 워 불 참 할 것이다.”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과격함을 막는 일은 결코 할 수 없고 다른 의견 내세워 불참하는 일도 할 수 없 을 것이니 가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 다.”하였다. 간절히 말하며 애써 다투었으나 듣지 않고 갔 는데 과연 선생이 말한바와 같이 되었다. 이에 사 우(士友)들이 탐복하였고, 동인(東人)들은 더욱 더 태한·북두처럼 흠모하여 매번 언급할 때마다 반드시 선생을 오늘날의 곽임종(郭林宗, 후한시 대학자)이라불렀다. 임진년(1592, 선조25) 여름 4월에 왜적이 대거 침입하여 경성(京城)을 지키지 못하고 28일에 대 가(大駕, 임금이 탄 수레)가 의주로 떠났다. 30일 에는 왜적이 도성에 들어오자 조정의 명령이 통 하지않으니원근에서소요가일어났다. 선 생 은 북 쪽을 향해 통 곡한 뒤 한 고 을의 선비 들 을 향교로 모아 백성들이 윗사람을 친근하게 여겨 어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도리로 깨우치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 는 의 리로 감 동시 키니 사 람들 이 모두 눈물 을 흘리 며주먹을불끈쥐지않은사람이없었다. 백 여 명을 모집하여 방략(方略)을 마련하고 제봉 고경명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회재 박광옥 (음성인)을 유진장(留陣將)으로, 큰형 황탄공을 운량장(運糧將)으로 삼았다. 또 건재 김천일과 함께 왕실을 위해 충성하고 왜적을 방어하는 계 책을 자주 도모하였는데 비분강개함이 말 밖으로 넘쳐났다. 이때에 전라감사 이광(李洸)이 정예병 7만 명 을 거느리고 금강에 진을 쳤다. 그러나 잘못된 말 을 듣 고 결 국 군 령 을 내 려 진 을 파 하 게 하 니 이 에 여러 군대가 한꺼번에 흩어져 돌아왔다. 선생은 분개하여 한두 동지와 함께 소장을 올려 번신(藩 臣,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관찰사)이 머뭇거린 죄를 배척하고 나라의 성패가 달린 기 틀을 조모조목 진술하였다. 대략 살펴보면 『삼가 생각건대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섬 오랑캐가 날뛰어 천리 길을 쳐들어옴이 무인지경(無人之 境)에 들어오는 것과 같아서 수백 년의 문물(文 物)을 간직한 영남지역이 하루아침에 적의 소굴 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방면대신(方面大臣, 지방을 다스리는 대신, 관찰사)과 절진(節鎭, 군 사상 중요한 지역)의 여러 장수들은 한 명도 북채 를 잡고 두드려 군중들에게 맹세하며 전진한 사 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 도의 순찰사 이광은 본 래 성품이 겁이 많아 적의 형세를 헤아리고 군마 (軍馬)를 정돈하여 적개심으로 사수(死綏) 할 계 책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이내 행군하여 공주 (公州)에 이르자 두려워 움츠리며 전진하지 못하 고 앉은 채로 병사들의 마음을 점점 헤이하게 만들 고예리한기세를날로사그라지게만들었습니다.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파천하고 도성이 함락 되었다는 소식들 듣게 되자 갑자기 징을 울려 병 사를 철수하고 곧바로 먼저 퇴각하여 돌아갔습니 다. 다행이 도내의 선비들이 의기(義氣)를 떨쳐 격려하고 타이르며 돈독히 권면함에 힘입고 더하 여 국가가 수백 년 동안 아름답게 길러준 은혜로 민심을 굳게 결속시키니 모두가 감동하여 분발해 야겠다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전 부사(府使) 신 (臣) 고경명과 박광옥은 뜻있는 고을 유사(儒士) 들과 함께 원근의 의병을 모집하였습니다. 신 고 경명은 이 달 11에 병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올 라갔고,신 박광옥은 본 도에 남아 있으면서 또 고 을의 병사들을 규합하여 근본을 보전할 계책을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관군의 기세를 도와 이루고 간악한 무리들을 탄압하여 조정의 지 휘를 기다리고자 했으니 이는 실로 옛사람이 강회 (江淮)를 차 단하 여 회 복을 도모 한 계 책이 었습 니다 . 그렇 긴 하지 만 이것 은 매우 큰 일이 어서 조정 의 명 령과 번원대신(藩垣大臣, 서울 도성 밖 변경을 맡 아 다스리는 관리, 순찰사, 병마절도사, 방어사 등) 들이 협 의와 협 력을 힘 입지 않 는다 면 그 형세 가 서 로 어긋 나서 일 을 해낼 수 가 없 습니 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문무(文武) 대신(大 臣)들을 선발해 보내되 밤낮으로 성화같이 달리 게 하여 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시기에 남쪽지 방을 진무하고 흩어져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모아 다시 근왕(勤王)의 군사를 일으킨다면 무너져 돌 아갔던 병사들은 모두 일전을 벌여 적을 쓸어내 는 공을 세우길 원하며 거의 손꼽아 기다릴 것입 니다. 또 경악(經幄, 경연)의 근신(近臣)들을 순 안어사(巡按御使)로 파견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묻고 임금의 뜻을 선포하여 산야(山野)의 어리석 은 백성들로 하여금 임금이 계신 곳을 분명히 알 게하고 나라가 백성들을 품어 보호한다는 뜻을 느끼게 한다면 바닷가의 궁벽한 모퉁이도 왕의 교화를 입여 애연( 욕然)히 천성(天性)으로 반드 시 윗사람을 친근히 하고 어른을 위해서 죽는 마 음을느낄것입니다.』하였고,또말하기를 『신들이 지나간 역사를 두루 살펴보니 예로부 터 적의 병사들이 국경을 침범하여 열흘도 안 되 어 바로 도성을 함락시킨 것이 지금처럼 쉬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국가는 근 래에 인화(人和)를 잃었고 관리와 병사들은 적개 심이 없는데 간사한 백성들은 도리어 외적의 앞 잡이가 되었기 때문에 한 번에 여지없이 패배하 여 적을 막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 왕업(王業)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민암 (民巖, 민심이 험하다는 뜻)의 두려움을 염려하 며 민심을 보합하는 것으로천명을맞이하여잇는 근본 을 심고 속 히 덕을 받 드는 것 으로 민 심을 보 합 하는 근본으로 삼으며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 게 하여 백성과 함께 다시 시작하며 음양이 쇠퇴하 고 흥성하는 이치를 관찰하고 어진이와 간사한 이 가 나가고 물러나는 기틀을 살피며, 고굉(股肱, 다 리와 팔 즉 온 몸)의 신 하에 게 맡겨 서 조정 의 계책 을 이루고 지방관의 임무를 중하게 여긴다면 주희(朱 熹)가 참으 로 나 라를 회 복하 는 데 뜻을 둔 사람 은 칼을 어 루만 지거 나 손뼉 을 치지 않 는다 고 한 말 을 어찌믿지않겠습니까?』하였다. 그런 뒤에 배를 사고 사람을 고용하여 행재소에 전달하였다. 이때 왜적이 길을 차단하였으나 소장 이이르러남쪽소식을비로소듣게되니선조는크 게칭찬하고특별히장원서별제를제수하였다. 선생은 또 주변사 윤두수에게 편지를 보내 광 주목사 권율을 관찰사로 승진시켜 줄 것을 청하 였다.대략살펴보면 “본 도의 감사를 행조(行朝)에서 임명하여 내 려 보낸다면 한 달 안에 도착하기가 쉽지 않을 것 입니다. 도내의 수령중에는 오직 광주 목사 권율 이 담력과 지략이 있습니다. 이 사람보다 더 적임 자는없습니다.”하였다. 권공이 광주목사에서 관찰사로 승진하여 강대 한 왜적을 섬멸하고 사직을 보위하여 결국 국가 중흥의 대업을 이루니 그 공을 따져 보면 실로 선 생의힘이었다. 계사년(1593)에대신의천거로황원감목관(監 牧官, 지 방에 있 는 목 장에 관 한 일을 맡아 보는 종 육 품의외관직)되었다가사임하고돌아왔다. 정유년(1597, 선조30) 가을에 왜적이 다시 으 르렁거리며 호남을 침범하였다. 선생은 아버지 첨추공을 모시고 영암에 이르렀다가 장차 서해를 따라 서울로 가서 어가를 호종할 계획을 세웠다. 그 러 나 왜 적 이 바 다 와 육 지 에 서 갑 자 기 닥 쳐 와 창졸간에 배를 버리고 월출산으로 들어갔다. 첨 추공의 연세가 여든이어서 몸소 업고 부축하여 초목이 우거진 사이에 편안히 모셔두고 왜적에게 발견될까 걱정하여 서로 바라보이는 곳으로 물러 나 엎드려 있었다. 왜적이 부친 쪽으로 향하는 것 을 보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가 보듬고 통곡하 면서 몸으로 감쌌지만 시퍼런 칼날에 난자당하여 몸에 온전한 살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잠 시도 놓지 않다가 결국 부자가 함께 살해당하였 다. 왜적이 물러간 뒤에 사람들은 여전히 부친을 끌어안고 있는 시신을 보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날이곧9월23일이었다. 선생의 이 같은 효행은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 도 2집(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박종정이 아버 지를 구하다(宗挺救父)’ 진사 박종정은 광주(光 州) 사람이다. 임진왜란에 아비 나이 일흔일곱에 왜적에게 잡힌 바 되거늘, 종정이 울면서 몸으로 아비를 가렸더니 다 해침을 입으니라. 금상 때 정 문을 내렸다.(원문 進士朴宗挺光州人壬辰倭亂父 年七十七爲賊所獲宗挺號哭以身蔽父俱被害 今上 朝 門)라고전해진다. 1 1 월 에 광 주 효 우동 분작 산 묘좌 의 언 덕에 장사 를 지 냈으 며 이 일이 조 정에 알 려져 정 려를 명 하였 다. 부인은 죽산안씨로 첨추 중관(重寬)의 따님인 데 예의범절이 인정되었으며, 말씨는 온화하고 낯 빛은두드러워 육친(六親)그 덕을 칭송하였으며 1 남 1녀를두었는데 아들은통덕랑 구( 냑)이고 따님 은사인(士人)이정발(李挺撥)에게시집갔다. 선생은 지기(志氣)가 청명하고 마음이 비어서 사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일찍이 가정에서 가 르침을 받아 자신을 반성하며 실질에 힘썼고 궁 리에 힘을 기울여 사서(四書) 육경(六經) 제자백 가의 글을 두루 꿰뚫지 않음이 없었으며 여위고 병든 몸이었지만 날마다 몇 조목을 외웠다. 평소 에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단정하고 엄숙하게 앉 았으며기대거나누운적이없었다. 평소에 저술이 매우 많았는데,특히 척독(尺牘, 서간문)에 능하여 문장이 간결·고아(古雅)하고 의리는 조리 있고 통창(通暢)하였다. 필법은 강 건하고 아낄만해 사람들이 모두 보물로 여겼다. 시(詩)또한 웅장하고 심오하며 우아하고 건실하 여 절 로 일가 (一家)를 이루 었다 . 남긴 글은 난 리 중 에 다 없 어졌 는데 겨우 몇 편 을 수습 할 수 있어 훗날 난계집으로 간행되었다. 난계집은 삼우당공에 의 해 편 찬되 어 11대손 (휘 계영 )에 의해 중 간하 고, 12 대손 재순(현 회장)에 의해 국역발간과 보성문화 원의협조를얻어난계실기가간행되었다. 선생은 학문의 실질을 품고 경세제민(經世濟 民)의 기량을 쌓아 당시에 펼쳐보지 못했지만 나 라가 위태롭고 어려운 때에 칼날을 받으면서 감 싸 안아 충성과 효도를 이루었다. 삶을 버리고 의 (義)를 취하여 한 몸으로 만고의 강상(綱常)을 세우니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표창함이 절로 있 게 되었다. 그리고 육류당 유사경은 전기(傳記) 를 썼고, 제자 문강공 우산 안방준은 유사를 지었 다. 우산은 말하기를 “호남에서 이연평(李延平, 송나라 학자)처럼 의론이 화평한 사람은 전혀 없 었 는 데 오 직 광 주 의 박 난 계 한 사 람 만 있 을 뿐 이 다.”하였고,또 그 문집 속에서 이르기를 “난계는 말고 빼어나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임금과 어버 이를 걱정하고 사랑했으며, 당론을 세우지 않아 화평한 기상이 성혼(成渾)의 학문 방향과 우연히 일치했다”하였다. 월정 상공(月汀 相公) 윤근수(尹根壽)는 어떤 사람에게 준 편지에서 “박 아무개는 뜻을 독실하 게 하고 배우기를 좋아했는데 불행하게도 정유재 란에효(孝)죽었다”하였다. 이처럼 선생의 삶은 국가에는 충(忠)으로 부모 에게는 효(孝)를 다하면서 혼란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한 애민(愛民)의 정신으로 일관하면서 더욱 빛이 난다 하겠다. 이에 후손 박재순 회장이 평소 현창사업에 매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 고타계함으로서이글을대신해본다. /글븡사진=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난계박종정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선원(璿源)세계 임진왜란에 백의로서 공헌하고 정유재란에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몸을 바친 효자 석류재전경,광주광역시서구노대실로41번길32-23.석류재뒤편정려각이있고 그 뒤 난계선생의묘소가있다. 동 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宗挺救父(종정 구부)박종정이아버지를구하다 난계선생 신도비. 석류 재경내에있다. 난계선생묘. 난계선생정려각. 난계집. 선생의 생애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