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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희 2년 무신(1908) 11월 23일 선생 48세로 정성련 휘하 의병대에 자원입대하여 제2초 십장(什長)을 임명받아 의병군수품 적기조달하고 전주 金溝泰(김구태) 인임실등지에서 왜노(倭奴)와의 감전(酣戰)에 왜적의 허를 틈타 습격 기 은현출몰이 매우 교모하여 전강(前僵)후 속전공이 혁혁이어늘 융희 3년 기유(1909) 윤 2월 8일 왜노 경찰에 피체되어 형신(刑訊) 혹독하였다.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재판장을 크게 꾸짖기를
"이제 우리 한국이 너희들에게 한일신협약(1907)을 강제로 맺게되어 내정을 간섭 받고 특히 군대를 해산하였으니 무력항쟁을 계속 하려는 것이다". 선생은 교수형 언도를 받아 창의의 정당성으로 대구공소원에 항고하였다. 여기서도 재판장을 강호령(强號令)하여 대한민족 정기를 정정당당하게 외치시니 悲咤怒罵其凜然(비타노매 기 늠연)하였다. 징역형 15년 언도로 옥고 昏倒(혼도)하여 가족들이 들것으로 본가에 모시어 1년여 신음타가 1925년 을축 음12월 28일 새벽 2시 65세를 일기로 순국하시니 오호라 애재 철전지통 한을 회포한채 歸盡也矣(귀진야의)라. 묘는 전북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구례동 후산 29번지 임좌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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