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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내원(朴來源,이명 朴來元)은 1917년 보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종로기독교청년회에서 공부한 뒤 대동(大東)인쇄주식회사 인쇄직공 견습생이 된 이래 사상운동에 심취하여 노동단체와 청년단체 활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1924년 10월 청년운동단체인 용진당(勇進黨)을 조직한 바 있으며,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나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깊이 관여하면서 조선공산당과 천도교(天道敎)의 양세력을 연결하는 매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5년 3월 권오설(權五卨)의 지시에 의해 경성노동연맹(京城勞動聯盟)을 조직하였으며, 인쇄직공조합연맹(印刷職工組合聯盟)·경성인쇄직공청년동맹(京城印刷職工靑年同盟) 등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 밖에도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돈화청년회(敦化靑年會)·한양청년연맹(漢陽靑年聯盟)·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신흥청년사(新興靑年社) 동인·화요회(火曜會)·정우회(正友會)·불꽃사(火焰社) 동인·연우사(鉛友社) 동인·혁청 단원·조선기근구제회(朝鮮饑饉救濟會)·무산자동맹(無産者同盟)·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등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제2차 조선공산당에서는 경성야체이카의 언론기관 프랙션에서 활동했다. 그는 천도교 교주 박인호(朴寅浩)의 재종질(再從姪)로서, 천도교 계통의 민족운동에 앞장 섰다. 그는 천도교가 신·구파로 분화될 때 1926년 4월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의 창립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조선공산당이 6·10만세운동을 계획하기에 앞서 추진한 메이데이 기념시위에도 깊이 관계하였다. 당시 조선공산당에서는 조선노농총동맹을 앞세워 기념시위를 전개하려고 했다. 이때 그는 조선노농총동맹의 핵심 간부로서 기념시위의 제반 준비를 담당했다. 그런 가운데 융희황제가 승하하면서 기념시위 계획이 6·10만세운동으로 전환되자, 그는 권오설로부터 격문 인쇄 및 지방 조직과의 연락 임무를 부여받고, 이같은 사실을 권동진(權東鎭)과 천도교 교주 박인호와 이종린(李鍾麟)·박내홍(朴來弘) 등에게 알려 6·10만세운동에 대한 적극적 승낙을 받아내었다. 그는 격문 인쇄를 위해 손재기(孫在基)·백명천(白明天)·양재식(梁在植) 등 천도교 인물과 민창식(閔昌植)·이용재(李用宰) 등 인쇄직공조합원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격고문(檄告文)’, ‘대한독립만세’, ‘조선인 교육은 조선인 본위로’, ‘산업은 조선인 본위로’, ‘대한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등의 격문 인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사일이 임박하는데 자금이 없어 격문을 배포가 어려워지자 권동진에게 1만원의 자금을 요청하여 쾌락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일경에 체포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천도교 구파청년단 상무위원, 천도교 중앙교회감사위원 겸 청년동맹대표로 활동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