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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암 박인호선생은 1908년 1월 18일 천도교 대도주(大道主)가 되어 천도교의 정신적·경제적 지주가 되었고 그 조직을 활용하여 개화문명의 보급과 독립사상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21일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 손병희의 명으로 천도교 보관금 중에서 5,000원을 최린(崔麟)에게 지급하여 3·1독립운동 경비조로 지원하였고 2월 28일에 천도교 이종일(李鍾一)·이종린(李鍾麟)·윤익선(尹益善) 등과 함께 협의하여 〈조선독립신문〉을 천도교 경영 인쇄소 보성사(普成社)에서 몇만매를 인쇄하여 3·1독립운동 때에 전국으로 배포케 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드디어 3월 1일이 되자 천도교 대도주로서 3·1독립운동의 중앙지도체 49인 중 한사람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융희황제의 국장을 기회로 6·10만세운동을 준비할 때 이들과 연계하여 격문 10만여 매를 인쇄한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독립단'이란 도장을 조각 날인하여 58개 지방도시에 배부하는 등 거사를 도왔으며 이때 사용한 도장을 자기 집에 보관하였다. 그는 또 1936년 8월 14일 천도교 제2세 교주 최시형의 승통(承統)기념일인 지일(地日)기념 행사를 위하여 서울에 상경한 천도교 두령들에게 왜적을 경계한 초대교조 최제우의 뜻에 따라 교인들에게 멸왜기도(滅倭祈禱)를 지시한 것이 발각되어 병석에서 심문을 받는 등 다년간 조국의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