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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내홍(朴來弘)은 서울 사람이다. 1920년대 천도교청년당(天道敎靑年黨)과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 등을 결성하면서 천도교의 청년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신간회(新幹會) 발기인으로 활약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천도교에서는 3·1운동 이후 천도교의 조직을 쇄신하면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천도교청년당과 천도교청년동맹 등을 조직해 갔는데 이 때 그는 천도교내 젊은 지도자로써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천도교측의 실무담당자 박내원(朴來源)을 후원하면서 만세운동의 조직과 자금에 대한 지원활동을 벌였다. 천도교 교주 박인호(朴寅浩)의 아들이기도 한 그는 천도교측의 6·10만세운동 계획이 사전 발각되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으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과 협동전선을 형성하여 추진해 갔던 6·10만세운동에서 그는 배후 지원의 역할을 맡았다. 당시 천도교는 6·10만세운동에 필요한 전국의 조직망과 격문 인쇄 등을 맡는 등 만세운동의 대중 확산에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발각 후 천도교측에서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천도교 지도층의 6·10만세운동 관여사실을 숨겼으나, 실은 박내홍을 비롯하여 천도교 구파의 지도자인 권동진(權東鎭)·이종린(李鍾麟)·박인호 등이 배후에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천도교측의 인사들이 이러한 비밀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일제의 검거망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1927년 민족협동전선체로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될 때 천도교 지도자들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신간회 결성에 크게 힘을 쏟았다. 신간회 창립 간사의 일을 맡았던 그는 1928년 10월 5일 경운동 천도교회 사무실에서 단도를 든 괴한 서을봉(徐乙鳳)에 피습당하여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