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page


10page

공도 사옥(士玉) 같은 이 백인(百人)만 있으면 내 걱정 없겠다 하여 좌영장으로 하였으며 정공의 출옥재거(再擧)후 입암에서 그는 그 거느린 휴병일대(休兵一隊)로써 먼저 적을 치다가 전세불리(戰勢不利)하여 정이양공(鄭李兩公)및 여러동지 죽자다시 정공환직(鄭公煥直)을 받들고 그는 중군(中軍)으로써 전전(轉戰)하다가 정공 또 청하에서 붙잡히자 대장을 중도탈회(奪回)하려 하양까지 달렸으나 뭇미치고 팔공산에 의거(依據)하다가 다시 최공세한(崔公世翰)을 받들어보현산에 진쳤으나 최공 또 붙잡히매 스스로 의사(義師)를 거느려 그 휘하에게 자신을 중군(中軍)으로 부르게하고 장차 대장(大將)감을 구하여 대업을 이루려 하였으며 전일(前日) 입암에서의 경거(輕擧)를 뉘우쳐 절일(節日)이면 전주장(前主將)의 묘(墓)에 치전통곡(致奠慟哭)하였으며 장기(長鬐)를 공함(攻陷)하고 북동대산에 의거(依據)하였으나힘의 차(差) 현수(懸殊)하여 칠전팔령(七顚八零) 해산하지 않을 수 없는 지두(地頭)에 이르러 마침내 붙잡혀 적을 통매(痛罵)하다가 문신(問訊)하는 적관(敵官)에게 내 적(敵)을 죽여 복국(復國)을 못한 바에 죽음이 있을 뿐 무엇 묻느냐 하고 의자로 쳤으며 30년 형(刑)으로 되매 내 늙으면 나가도 의거(義擧)를 못하리니 차라리 죽으리라하고 옥문(獄門)을 깨뜨려 다른 수도(囚徒)를 탈출시키고 의연(毅然)히 죽음에 나아가니 때 4242년(서기1909년) 기유(己酉)라. 한 누이 있어 그 시체를 거두어 영천 자양면 보현동 기룡산 하 음지번등(陰地番嶝) 미좌(未坐)에 반장(返葬)하였으며 4295년(서기1962년) 오일절(五一節) 건국공로상 내렸다. 공의 일명(一)名) 세기(世紀)라 하며 고(考)의 휘 준(俊) 비(妣) 오씨(吳氏)요 배(配) 최씨로 일자(一子) 삭불(朔芾) 손(孫) 진우(震雨) 있다. 이에 본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