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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현임군수 김돈곤의 배려로 2800만원의 거액을 출연받아기때문이다. 가지고 온 몇장의 자료를 내놓으면서 이르되 '석운 선생은 매헌 윤의사와 같은 마을에 살았으며 매헌 조부의 부탁으로 서당훈장을 맡아 매헌6세부터 14세까지 교육했은 학문 사상의 기초가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할수있습니다 윤의사의 거사가 있은 후에는 칠갑산으로 피신하여 훈학도 멈추고 가구수선공 차림으로 다니면서 호구지책을 삼았다가 을유광복을 맞게되었습니다. 선생은 예산이와에도 홍성 결성과 청양의 정산 청남 등지를 전전하며 훈학생활을 하였으나 세태의 변천으로 학동이 희귀하니 그 활계의 군색은 불언상입니다. 탄천 가척리에서 훈학하시다가 무남4녀로 서거하시니 그 동민들과 청소리 제자들이 합력해서 장례를 치른 그 참상은 말로 다하지 못합니다. 지금에 와서 회고해보니 선생은 본래 간묵하지만 히국의 경계도 험악하므로 윤의사에 대한 관계는 자세리 들은바가 없고 기억되는 것은 윤의사가 매일 배통할때 혹시 막히면 오른쪽 귀밑머리를 뽑아 피가 흐르고 권강을 하다가 막히면 자기 팔을 물어 뜯어 피를 흘리곤 했으며 윤의사의 명리에 양이 부정함으로 적색포로 상복의 속을 넣게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기억이 납니다.' 하고 또 이르되 '선생꼐서 늘 말씀해주신 훈계로는 첫째로는 장부의 입지는 정도가 아니면 가지말아야 하며 둘쨰로는 뜻을 세우면 꼭 지켜야 하며 세째로는 최고의 기회를 택하며 명분있는 일은 죽음도 피할수 없느니라 등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하였다. 오호라 공의 신후사정이 적막했음은 시대상황이 그러하였다 세노인도 만년에 짧은 시간의 제자로서 겨우 단란한 몇마디의 증언에 불과하지만 공과 윤의사의 관계를 충분히 헤아려볼수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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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윤의사에 대해서는 그 천성이 남다른데가 있음을 알수있도다. 이 세노인은 공의 유적을 매몰에만 맡겨둘수없다해서 군청에 여러차례 진정한바 거금을 내주어 송덕비를 세우게 했으니 또한 하나의 미담이 아닐수없도다. 이로인해 우리나라의 광복과 독립에 막대한 기여를 남긴 윤의사가 있게한 하나의 숨은 자취를 발굴해서 다함꼐 오래도록 추모하고 애족애국하는 교훈이 되게 하였으니 이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도 감동한바 깊으며 위와같이 추리해서 천하의 후세에 보이려는 바이다. 대한민국101년 기해입하절에 한국고전번역 자문위원 월성 이성우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