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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2월29일 토요일 6 (제158호) 기 획 진원은전라남도장성군남동부에있는면으로면의북부는 불태산(602m) 줄기로 가로막혀 있으며, 그 밖의 지역은 대체 로 낮은 산지와 넓은 평야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구릉지대에서는 과수재배와 낙농업이 이루어진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담양 대전면에 연접해 있으며, 총 면적 은 28.3㎢로써 우리군 전체의 5.4%를 차지하고, 인구는 3,700 여명으로써 군 전체의 6.7%를 차지하고 있다.불태산 등반, 각 종 농촌체험 등 자연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친환경 웰빙 지 역으로써 장안만목 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 不如長城一目) 노사 기정진 선생이 학문을 강론하던 담대헌과 선생을 기리 는 고산서원이 있으며 명종 1년(1546)에 박원순(朴元恂)에 의해 건립된 청계각, 고려초기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 는진원성등유서깊은문화유적들이있다. 행정구역은 선적리·율곡리·산정리·학전리·진원리·산동리 ·학림리·상림리·용산리 등 9개리가 있으며, 학림리는 진원박 씨의집성촌이기도하다. 진원박씨가 진원 땅에 정착한 연대는 대략 고려 중기 명종 (明宗) 무렵 이후로 추정되며, 여기에 진원고현(珍原古縣)을 중심으로 구진(丘珍)이나 진원(珍原)으로 관향을 정하였으 며, 진원박씨의 상계 선조들은 거의 장성(長城) 지방의 명족 (名族)들과 혼인관계가 이루어졌고,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 道地理志)에도 그때 장성군에 많은 씨족이 세거(世居)하고 있었지만 진원박씨와 영광오씨가 주성(主姓)이었다고 기록 되어있다. 진원박씨는 고려조에서 벼슬이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휘 진문(進文)공을 1세조로하고있다.그러나상세한문헌이전 해지지않아아쉽다.그의아들효대(孝大)는대상(大相,고려 초기, 관직의 16등급 가운데 일곱째 품계)을 지냈으며, 손자 빈(贇)은 검교장군(檢校將軍) 증손 성량(成亮)은 판군기감 (判軍器監)이고 현손 첨(瞻)은 순충론도(純忠論道) 동덕좌 명공신(同德佐命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 수 문하시중(守門下侍中)판도평의의사(判都評議使司事)겸 판 병조상서사(判兵曹尙瑞寺事)우문관대제학감(右文館大提學 監) 예문관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 영경연사(領經筵事)로 익양백(益陽伯)에봉해졌고시호는충의(忠義)이다. 시조에서 6세까지의 묘소가 실전되어 전남 장성군 동화면 용정리 기산마을 서당산(골)에 ‘진원박씨육세제단(珍原朴氏 六世祭壇)을세워향화를받들고있어그비문을인용해본다. [진원박씨육세제단비(珍原朴氏六世祭壇碑)] 『鰲山(오산, 장성예명)읍에서 서쪽으로 십리 남짓한 書堂 山(서당산)아래 長柱嶝(장주등)에 땅을 다듬어 神位(신위) 를 만드니 이는 우리 始祖大將軍府君(시 조대장군부군)이하 六世의祭壇(제단)이다. 삼가 생각컨데 동방의 朴氏는 신라왕 에서 비롯되어 八大君(팔대군)에서 나뉘었다고 하지만 우리 진원박씨는 중간에 昭穆(소목, 사당에신주를모시는차례)이 빠져 부군이 譜乘(보승)에 오른 시조가 되었다. 분군의 諱 (휘)는 進文(진문)으로 고려조 때의 대장군의 벼슬에 이르렀 다. 아들 諱 孝大(휘 효대)는 직위가 大相(대상)에 이르렀고 손자 贇(빈)은 檢校將軍(검교장군)이고 배위는 진원吳氏로 金吾衛將軍佐石(금오위장군좌석)의 따님이다. 증손 諱 成亮 (휘 성량)은 判軍器監(판군기감)이고 배위는 전주전씨(全 氏) 元呂(원려)의 따님이다. 현손 諱 瞻(휘첨)은 純忠論道同 德佐命功臣(순충론도동덕좌명공신)壁上三韓三重大匡(벽상 삼한삼중대광) 守門下侍中(수문하시중) 判都評議使司事(판 도평의사사사)겸 判兵曹尙瑞寺事(판병조상서사사) 右文館 大提學監(우문관대제학감) 藝文春秋館事(예문춘추관사) 領 經筵事(영경연사)로 益陽伯(익양백)에 봉해졌고, 諡(시)는 忠義(충의)이며 배위는 진원吳氏 檢校軍器監(검교군기감) 益(익)의 따님이다. 5세손 諱 洪瑞(휘홍서)는 嘉善大夫(가선 대부)전라도 병마절도사이고, 배위는 전주 崔氏 松(송)의 따 님이다. 이것이 계승에 실려 내려오는 事項(사항)이고 墓所 (묘소) 및 生卒(생졸)의 연월과 위 兩代(양대)의 배위. 姓氏 (성씨)가 모두 전하지 않고 다만 官(관)과 封(봉)만 기록되었 을 뿐이니 文獻(문헌)의 인멸됨이 매우 개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府君(부군)이 이미 멀리 왕가의 遺緖(유서)를 이어받 아 할아버지 아들 손자 三世가 모두 將相(장상)의 직위에 올 랐고충의공은또 淸要職(청요직)을다 거쳐封諡(봉시)의恩 典(은전)이 뭇 집안에서 벗어났고 절도공이 朝家(조가)의 발 탁을 입어 한 지방의 병마 權炳(권병)을 맡았으나 이로 보아 累世(루세)에 材器(재기)가 卓越(탁월)함과 德業(덕업)의 성함을증험할만하다. 또 節度公(절도공)의 아들 溫(온)이 일찍이 진사에 올라 구 례감무를 맡았고 이분이 낳은 熙中(희중)은 세상에서 葦南先 生(위남선생)이라 부르고 벼슬은 예문관 대제학으로 春亭 卞 季良(춘정 변계량)과는 道義(도의)의 사귐이 깊었다. 浩亭 (호정) 河崙(하륜)의 문하에 從遊(종유)하였으며 청명과 直 道(직도)로 國朝(국조)의 明臣(명신)이 되어 士林(사림)이 학림에 제향 하였다. -중간 생략- 다 기록할 수 없고 생원과 진사에 합격된 분도 모두 五十여분이나 된다. 생각하니 세대 는동떨어지고난리를겪어六世의墓城(묘성)이모두전해지 지 않아 자손이 香火(향화)의 받음을 펴지 못한 것이 수 백년 오랜세월이되었다. 이러던 차에 여러 종인들이 이를 개탄하여 마침내 發議(발 의)하여 壇(단)을 만들어 제사 지내는 前例(전례)를 가지고 나에게 禮(예)을 물었다. 나는 삼가 명을 듣고 위연히 탄식해 말하기를 뷺지금 근본을 등지고 선조를 잊는 때에 우리 宗人 (종인)들이 능히 이성을 말하여 先世(선세)에 이루지 못했던 일을가지고報本(보본)의예를펴라고하니생각컨데하나의 後孫(후손)으로 感慨(감개)가 깊다.어찌 예문에 확실한 典據 (전거)가 없음을 의논해 말할 여지가 있으랴 더구나 禮經(예 경)에 비묘 遠祖(원조)를 合祀(합사)하는 사당을 없애고 壇 (단)을만든다는글이있고 우리 夫子(공자)가 묘를바라보고 단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어 후인이 이것을 모방하여 묘소를 잃은 곳에 설치한 예가 가끔 있으니 安東(안동)의 三太師(삼 태사)와 丹陽(단양)의 萬祭酒倬(만제주택)이 그 하나인즉 아 마 아무런 이의를 일으키는 혐의는 없고 또한 단을 설치한 위 치로 부자와 조손은 기운이 서로 통하는 것이니 마땅히 구례 공 묘성의 근처에 설치하여 사당안의 소목 제도를 모방하여 시조의 신위를 서쪽에서부터 남쪽으로 향하여 이하 다섯 위 는 序次(서차)대로 부하되 각각 그 자리를 표시하고 함께 配 位(배위)를 列享(열향)하여 歲一祭(세일제)를 함께 올린다 면 참으로 神理(신리)에도 맞을 것이다뷻하니 모두를 그렇게 하지고 말해 이에 좋은날을 받아 땅을 다듬어 儀式(의식)을 갖추고단옆에비를세워그사실을기록하려하면서淺學(천 학)이 감히 감당하겠는가? 하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끝내 받 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世系(세계)의 源流(원유)와 壇事(단 사)의 顚末(전말)을 이상과 같이 기록 한다. 이 일을 시종 經 紀(경기)하는데 수고한 이는 洪柱(梧西), 貞柱(松谷), 琯柱 (三水)諸宗(제종)이고정주가또 전면비문를썼기 때문에 아 래에내가연하여기록한다.해는1990.년4월上澣(상한)이다.』 고려 말엽에 전 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6世 홍서(洪瑞)의 아들 휘 온(溫)은 구례감무(求禮監務)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희중(熙中)은 진원박씨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그는 태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로에 오른 이후 이조(吏曹)·병조정랑(兵 曹正郞),동궁(東宮,훗날세종)서연관(書筵官)을지냈고,예 문관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을을 역임하였으며 해동명필 (海東名筆)이라 칭송을 받았고, 춘정 변계량春亭 卞季良)과 는 도의(道義)의 사귐이 깊었다.호정(浩亭)하륜(河崙)의 문 하에 從遊(종유)하여 호정(浩亭)의 선친(先親) 하윤린(河允 潾)의신도비문을쓰기도하였다. 전농시윤(典農寺尹)으로 있을 때 일본국 회례사로 국위를 선양하였으며,명나라에 조선건국의 승인을 받으려고 사신으 로 다녀온 후 예문관직제학에 제수되었고,특히 고조선의 6대 저수지의 하나인 김제의 벽골제(碧骨提) 수축 때 경차관(敬 差官)으로 공사를 완성 그 업적에 감타나여 백성들이 그 공을 기리는송덕비를세웠는데지금도남아있다. 1426년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임명되고 1429년 결연(決 然)히 진원(珍原)땅에 귀향하여 위남어수라 자호(自號)하고 후진양성에 전념했으며 청백전가(淸白傳家)의 가훈(家訓)을 남겨 지금까지 종훈(宗訓)으로 이어오고 있으며 공(公)은 사 후(死後)에 학림사(鶴林祠, 장성군 진원면)에 배향(配享)되 었다. 뱚관향조약사 진원박씨(珍原朴氏) 진원박씨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밀성대군 의후예가아니다.진원박씨최초의족보인정유보 (丁酉譜,1657년 발행)에 의하면 시조는 진문공(珍 文公)이며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 로 고려조에서 벼슬이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 는데 그 이상은 문적이 없어 가고할 수 없다(新羅 宗姓 事 高麗位至 大將軍 記上文籍 不存 不可攷) 라고 기록되어 있어 진원박씨는 휘 진문(珍文) 公 을시조로받들고있어이번호에는전남장성군진 원면을관향으로전남보성등지에산재해있는진 원박씨에대해알아본다. 뱚관향진원(珍原)의연원 뱚진원박씨약사 육세제단비:전남장성군동화면용정리기산마을 뱚진원박씨중흥기 전남장성군동화면용정리선영전경. ▶7면으로계속 구례감무공(휘홍서)묘역:장성군동화면용정리기산마을 CMYK